15일 송담서원 표충사서 '사충신 향례' 봉행
425년 전 왜적 맞서 싸우다 순절 첫 의병장들



"오늘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5년 되는 날입니다. 먼 옛날 이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충신을 기리며 항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스승의 날이자 성년의 날이었던 15일 김해 동상동 송담서원에서 사충신 향례가 진행됐다. 사충신은 임진왜란 당시 김해에서 끝까지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최초의 의병장 송빈(1542~1592), 이대형(1543~1592), 김득기(1549~1592), 류식(1552~1592)을 말한다.

이들은 425년 전 음력 4월 16일 동래성을 함락한 뒤 김해부성으로 쳐들어 온 왜적에 맞서 사흘간 성을 지키다 4월 20일 순국했다. 후손들은 선조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송담서원의 표충사에 사충신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음력 4월 20일 향례를 봉행해 왔다.

▲ 15일 송담서원에서 열린 사충단 향례에 참가한 유림들이 절을 하고 있다.

향례를 앞두고 연하늘색, 연두색, 연분홍색, 흰색 도포와 검은 유건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유림들이 모였다. 이들은 송담서원에 모여 앉아 향례를 관장하는 제관을 정했다. 사충단 표충회의 송우진(김해향교 의전수석장의) 총무가 행사를 주관했다. 제사에서 술을 부어 올리는 일을 맡는 대축과 삼헌관은 향례 전에 미리 임명하지만, 집사 등은 열흘 전 유림 중에서 고른 뒤 행사 당일 재확인한다. 최근 열흘 사이 사고를 당했거나 집안에 흉사가 있는 사람은 집관에서 제외한다.
 
초헌관은 김해왕릉 숭선전 김효구 참봉, 아헌관은 정순창 유림, 종헌관은 김관숙 유림이 각각 맡았다. 삼헌관에 이어 "장의에~, 학생에~" 라는 식으로 음율에 맞춰 20명을 넘을 것 같은 이름이 호명됐다. 송 장의는 "혹시 몸이 불편해서 소임을 보기 어려운 분은 말해 주길 바란다"고 안내했다. 모든 사람이 맡은 역할에 만족하는 듯했다.
 
제관이 모두 정해진 후 참가자들은 송담서원 뒤편 표충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원과 표충사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신도(神道)라 하여 사람이 이용할 수 없다. 들어갈 때나 나올 때에는 모두 오른쪽 문을 이용한다. 도포를 입은 유림들은 오른쪽 문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한 줄로 줄지어 표충사로 올라갔다.
 
표충사 앞에는 하얀 천막과 유림들이 함께 절을 할 수 있도록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유림들은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올라갔다. 표충사 안에는 왼쪽부터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의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일반 제사상 차림과 달리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생선, 무, 미나리, 쌀 등이 모두 날것이었다.
 
초헌관인 김해왕릉 숭선전 김효구 참봉이 고인에게 예물로 바치는 비단을 신위에 올리는 전폐례를 시행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향례가 펼쳐졌다. 김해 최초의 의병장이라는 뜻에서 예포도 발사됐다. 제사를 진행하는 제관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가 표충사 앞에 준비된 금색 대야에 손을 씻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했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제사상에 올릴 술을 따르는 헌작례, 초헌관이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는 음복례, 축문을 태우는 망료례 등의 순서로 약 1시간 20분 동안 제사가 진행됐다. 삼헌관은 술을 올릴 때마다 임금을 알현할 때 손에 쥐는 나무 홀을 손에 쥐었다가, 의복에 꽂았다가, 다시 손에 쥐었다가를 반복했다.
 
"생활에 불편이 없는 분들은 안경을 벗어달라"는 안내에 따라 유림들은 배(절)를 드릴 때마다 안경을 벗었다가 쓰기를 반복했다. 스승이나 어른을 만날 때 당연히 갖춰야 하는 예라고 한다. 다소 번거롭고 불편할 수도 있는 격식이었지만 제관을 포함한 모든 참석자들은 불평 없이 예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엄숙하게 따랐다. 향례를 다 마치자 참가자들은 서로 악수를 하며 안부를 건넸다.
 
향례를 총괄한 송우진 장의는 "항례는 사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중요한 행사다. 앞으로도 향례가 지속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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