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형태가 신분차별’ 현실 비판
 파견제 규제·최저임금 등 대안도




IT 컨설팅 업체에 다니는 A 씨는 파견 나가서 일할 회사를 찾지 못한다. 그에게는 'available(미가동)'이란 딱지가 붙었다. 그는 '면담'을 이유로 수시로 상사에게 불려가 모욕을 당했다. 결국 회사의 의도대로 '개인적인 사정에 의한 퇴직'을 했다. 의류 판매 대기업에 입사한 B 씨는 입사식 전에 기업 이념 등을 외우는 시험을 쳐야 했다. 그룹별로 외우지 못하면 다음 날에도 과제는 계속됐다. 3개월 뒤 입사동기는 40명에서 6명으로 줄어 있었다.

위 사례는 오늘날 일본의 대표적인 '블랙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일본 경제학자이자 간사이대 명예교수인 모리오카 고지는 <고용 신분 사회>에서 다양한 사례와 통계 자료를 곁들여 일본 사회의 불합리한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소개되는 이야기들은 한국 사회의 모습과 판박이다. 일본의 고용 형태는 무한정 정사원, 한정 정사원(무기계약직), 시간제, 아르바이트, 계약직, 파견직, 개인 도급 노동자 등 다양한 형태로 나뉜다. 정규직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공공부문에서도 증가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의 40%에 이른다. 15~24세의 젊은 아르바이트생까지 더하면 2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다. 특히 아베 내각 출범 후 우리나라의 무기계약직(중규직)과 비슷한 '한정 정사원'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일본 노동사회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저자는 '기업 중심 사회', '지나치게 일하는 사회', '격차 사회', '빈곤 사회' 같은 용어를 거쳐 '고용 신분 사회'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각각의 취업 형태에 따라 고용 안정성과 급여, 사회적 지위 등이 계급을 넘어 신분 차별이라 할 만큼 심각한 격차가 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고용 신분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마치 신분을 부여받듯 고용 형태를 배당받는다.

이런 흐름 속에서 더 큰 피해를 보는 건 상대적 약자인 여성이다. '종합직'에 취직하는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일반직'이 대부분이다. 일반직은 주요 업무 대신 반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직군이다. 종합직보다 연봉이 적고 승진 기회도 제한적이다. 정규직이라고 해서 마음껏 신분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당도 없이 추가 노동을 강요당하기 일쑤지만, 비정규직으로 신분 추락을 당하지 않으려면 노예처럼 회사 방침에 따라야 한다.

책에서 일본과 유사한 사례로 종종 등장하는 한국의 현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잘못된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양국은 불명예스럽게도 장시간 노동, 높은 비정규직 비율, 성별 임금 격차, 낮은 여성 관리직 비율 등 각종 지표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2위를 다투고 있다.

저자는 고용 신분 사회가 아직 고착화되기 전이라고 진단하고, 지금이라도 개혁 정책을 통해 '현대판 고용 신분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간명하다. 파견 노동 규제, 최저임금 현실화, 성별 임금 격차 해소, 하루 8시간 노동 실현 등이다. 세계노동기구(ILO)가 제시한 '좋은 일자리(저자는 이를 ‘제대로 된 노동 방식’이라 표현한다)'를 실현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보다 한국이 더 적극적이라는 건 반가운 대목이다. 책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5년간 비정규직 노동자 9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성과를 선진 사례로 들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엔 더 좋은 소식이 속속 들려 온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됐지만 기간제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은 교사 2명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순직'을 인정받았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만들겠다는 정부 발표에 따라 인천공항공사는 비정규직 1만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이후 이어져 온 비정규직의 가파른 증가 추세가 20년 만에 한풀 꺾일 것으로 보인다.

부산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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