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락 탐방대장과 한 대원이 왕후사지를 살펴보고 있다.


파도 넘친 바닷가였던 수가리패총
발굴조사에서 신석기~철기 유물 나와
지금은 고속도로 건설 안내판만 남아

김수로왕 ‘태’ 묻었다던 태정마을에
허왕후 명복 빌기 위해 왕후사 창건

삼국시대 선착장 발견 관동체육공원
유적지 흙 덮은 뒤 모형관 만들어 전시



장유옛길 두 번째 탐방은 부산 강서구 범방동 가동마을에서 시작했다. 범방(수가리)패총에서 약 4500년 전 '최초의 김해인'을 만난 뒤 응달동 태정마을 왕후사지를 지나 관동유적체육공원, 율하유적공원에서 청동기·가야시대 김해인의 삶과 죽음의 흔적을 들여다 보는 일정이었다. 답사 거리는 약 8㎞.
 
"지금은 범방패총이라고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수가리패총이라고 부릅니다. 수가리패총 일대에는 발굴 후 고속도로가 건설됐습니다. 지금 가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청천문화회 옛길탐방대 김우락 대장은 나중에 실망할 수 있다며 탐방대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장유2동주민센터에 모인 탐방대원 18명은 차를 타고 남해고속도로 제2지선을 가로질러 가락IC를 지나 범방동 가동마을로 향했다.
 

▲ 부산 범방동 가동마을 한 예술원 앞에 서 있는 범방패총 안내판.

가동마을은 강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동마을을 알리는 팻말을 따라 도로로 진입하자 마을 이름에 걸맞게 조만강이 보였다. 조선 후기 때 김해군 장유면에서 일제강점기이던 1914년 경남 김해군 장유면 수가리 가동마을이 됐지만, 2000년 부산경남경마공원이 만들어질 때 행정구역 조정이 이뤄져 부산에 편입됐다.
 
"여기입니다. 모두들 내리세요."
 
김 대장의 말에 따라 차에서 내린 탐방대원들은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수가리패총의 흔적이라고는 한 식당 앞에 외로이 서 있는 안내판이 전부였다. 김 대장은 "지금 서 있는 언덕 앞 고속도로와 논들이 과거에는 바닷물이 넘실대던 김해만이었다. 바다에 풍부한 해산물을 먹고 살았던 최초의 김해인들은 바다에서 잡아 먹은 조개나 깨진 토기를 버렸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가 오늘날 역사적 장소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해의 신석기시대는 약 8000년 전부터 시작됐다. 최초의 김해인들은 약 4500년 전부터 고 김해만 일대에 정착해 사냥, 고기잡이를 하거나 곡식을 재배하면 산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지리지> 등에 따르면, 1978년 남해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경남도의 요청으로 같은 해 6~8월과 이듬해 부산대박물관 학술조사단이 수가리패총에서 긴급 발굴조사를 했다. 수가리패총에서는 조개, 빗살무늬토기, 돌칼, 숫돌, 뼈낚시 바늘, 흑요석 등 신석기 후기~철기시대 초기의 다양한 문화유물이 출토됐다. 수가리패총 유물은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됐다가 나중에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김 대장은 "흑요석은 일본 규슈에서 나는 화산암이다. 이미 4500년 전부터 일본과 해상교역을 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인상적인 사실은 성인 팔뚝만한 참굴 껍질이 수없이 나왔다는 점이다. 옛날에도 참굴이 맛있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라며 껄껄 웃었다.
 

▲ 탐방대원들이 율하유적공원에서 고인돌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다.

발길을 돌려 금병산 자락 아래 응달동 태정마을로 향한다. <김해지리지>에 따르면, 가락국 시절 김수로왕의 태(胎)를 묻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한자로 태아 '태(胎)', 감출 '장(藏)'을 써서 태장마을이었지만, 나중에 태정마을로 바뀌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8대손 질지왕이 452년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혼인했던 땅에 왕후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수로왕릉의 <숭선전지>에는 '왕후사는 태정에 있었던 임강사의 전신'이라고 기록돼 있다.
 
김 대장이 김해김씨의 제실인 '금병재' 뒤편 밭을 가리켰다. 밭이 있는 언덕에 오르자 김해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김 대장은 "옛날의 바다와 강은 오늘날 고속도로와 마찬가지였다. 배가 접근하기 힘든 산 중턱에는 절도 없었다. 학자들은 산기슭에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한 건 삼국시대 이후라고 한다. 이곳이 왕후사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왕후사지 뒤로는 금병산이, 앞으로는 드넓은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다. 녹음이 우거진 탓에 왕후사지에 남아 있는 기와 조각을 찾기 어려워 탐방대는 겨울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관동유적체육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초록색 들풀이 펼쳐진 곳에 관동유적모형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토지공사는 2001년 율하택지개발사업을 앞두고 유적 보존과 택지 개발의 기로에 놓였다. 현재 관동유적체육공원 일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삼국시대의 도로와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잔교시설, 지면식건물 구조 등 유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는 관동동 일대가 바다였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김해시, 한국토지공사, (재)경남고고학연구소는 머리를 맞대고 협의해 원래 유적을 땅 속에 묻고 그 위에 공원을 만들어 유적의 원래 모습을 알려주는 시설을 복원하기로 했다. 2005년 6월~2007년 12월 경남고고학연구소는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유적지 위에는 흙을 덮어 원래의 상태를 보존하고, 그 위에 유적모형관을 지었다.
 

▲ 탐방대원들이 율하유적관에서 고인돌의 구조를 살피고 있다.

김 대장은 모형관 안에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삼국시대의 도로, 선착장은 아마 공공기관에서 관리하던 주요 시설이었을 겁니다. 도로를 통해 물자가 운송되고 선착장으로 교역이 이뤄지면서 이 일대에는 주점, 주막, 여관 등이 들어섰겠지요." 물건이 오가고 상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던 관동유적공원 일대는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왁자지껄했던 선착장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바람을 타고 새소리만 울려 퍼졌다.
 
율하동 일대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가야인들은 선착장을 통해 교역했다. 사람들이 사는 데 무덤이 없을 리 없다. 관동유적체육공원에서 약 1.5㎞ 떨어진 율하유적공원 일대에서는 율하지구 택지개발사업에 앞서 진행된 지표, 시굴조사 결과 청동기·가야시대의 고인돌, 지석묘 등 각종 무덤, 고상가옥 등이 대거 발굴됐다. 김해시는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각종 무덤과 마을 유적으로 추정되는 잔교 등을 재배치하고 재현해 율하유적공원을 만들었다.
 
율하유적공원은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A지구, B지구, G지구다. A지구와 B지구는 고인돌공원, G지구는 마을유적공원이다. 세 곳 중 A지구의 면적이 가장 넓다. A지구는 김해기적의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A지구에서는 고인돌이 74기 정도 발견됐다. 면적이 너무 넓어 유적을 최대한 그대로 두되 고인돌끼리의 간격을 좁히는 방식으로 복원했다. 공원 곳곳에는 무거운 돌을 켜켜이 쌓아올린 고인돌이 설치돼 있다.
 
탐방대원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고인돌을 이리저리 살폈다.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유적을 지나며 탐방대원 권순혁(52) 씨가 말했다. "과거 김해인의 역사가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묻혀 있네요. 같은 시공간에 역사가 살아 있었는데 지금껏 장유에 살면서도 몰랐어요. 탐방길을 다음에 다시 걸으면 고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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