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등왕이 모친 허왕후를 위해 지었다는 모은암 전경. 오른쪽 바위는 허왕후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전한다.


‘무착산·안양리’불교 관련 지명 얽힌 산에
모은전·모음각 등 가야 시대 이야기 흔적

뒤편 바위굴엔 파사석탑 같은 재질 돌 추정
정상 인근 천지연, 수로왕릉 조성 연관 전설

한성동 목사 항거 기도원은 옛 사찰 자리
지표조사 결과 석탑 조각 등 다수 발견돼




생림면 생철리와 상동면 봉림리에 걸쳐 있는 무척산은 조선시대에는 '식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발 702m의 무척산은 다른 낮은 산과 낙동강을 굽어본다. 바위가 많고, 높이에 비해 계곡이 깊어 산세가 험한 편이다.
 
무척산은 이름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모은사 주지 강하 스님은 "원래 무척산이 아니라 '무착산(無着山)’이었다.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음운 변동이 일어나 무척산이라고 불리게 됐다. '무착(無着)'은 집착을 없애 편안함에 이른다는 불교적인 개념이다. 모은암 아래 마을이 안양리(安養里)다. '안양'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다. 지명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지명을 보면 이 곳이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어머니의 음성이 울린다는 뜻을 가진 모음각.

재야사학자인 허명철 조은금강병원 이사장은 1987년에 펴낸 <가야불교의 고찰>에서 '무척산이 무착산이라고 불렸던 건 '산에 있는 바위가 대부분 미륵신앙을 상징하고 있다. 3~4세기 인도 미륵신앙의 거두인 무착(Asanga)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라는 이도 있다'며 조금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어쨌든 무착이라는 이름은 불교와 연관이 있다는 점은 같다.
 
지역 사찰 가운데 가야왕족과 관련한 연기설화가 담긴 사찰들이 여럿 있다. 분성산 해은암(海恩庵)은 허왕후가 이역만리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데 감사하며 지은 절이다. 밀양 부은암(父恩菴)은 가야 2대왕인 거등왕이 부친인 수로왕의 은혜에 감사하며 세웠다고 한다. 무척산에는 가야불교 중흥을 위해 창건했다는 백운암이 있다.
 
하지만 지역사람들의 뇌리에 좀더 뚜렷하게 각인된 사찰은 무척산 모은암(母恩庵)이다. 거등왕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세운 암자라고 한다.
 
무척산 7부 능선, 멀리 밀양 삼랑진까지 굽어 보이는 명당에 모은암이 있다. 본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모은전, 종각인 모음각(母音閣), 산신당 등의 전각과 주거 목적의 요사채가 있다. 작은 규모의 암자 곳곳에는 허왕후와 관련된 이야기와 흔적이 남아 있다. 
 

▲ 과거 수행 장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

사찰 명칭이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는 모은암이 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허왕후가 고국의 어머니를 그리며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또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 난 왕자 10명 가운데 한 명이 허왕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강하 스님은 허왕후가 고국을 그리워하며 창건했다는 데 무게를 둔다. 왕자와 관련된 내용은 구체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이다.
 
모은암에는 2000년 전 암자가 창건됐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나 유적은 없다. 모은암의 본당인 극락전에는 석조 아미타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의 존재는 과거부터 모은암이 존재했다는 사실만 말해 준다.
 
모은사의 명칭과 경내 곳곳에서 전해지는 허왕후 관련 이야기를 통해서만 암자의 내력을 읽을 수 있다. 극락전과 모은전 앞마당에는 좌우로 10m 가량 늘어진 바위가 누워 있다. 이 바위는 허왕후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전해진다.
 

▲ 무척산 중턱에서 내려다본 김해평야.

파사석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모은전 뒤편 바위 굴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포함해 돌로 만든 18나한이 안치돼 있다. 비교적 최근 조성한 석불들이어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다만 제일 아랫줄의 나한 사이에 세워져 있는 돌이 허왕후릉의 파사각에 안치된 파사석탑과 같은 재질의 파사석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무척산이 가야, 가야불교와 밀접하다는 점은 모은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은암에서 조금 내려와 갈래길에서 다시 가파른 산을 오르다 보면 무척산 정상과 멀지 않은 지점에 인공 연못인 천지연이 있다. 하늘과 통한다는 정각인 통천정도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높은 산에 인공 연못이 있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단정할 수 없다. 다만 김해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에게는 이런 천지연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오랜 과거부터 전해 내려온 전설을 통해 내력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천지연은 수로왕릉 조성과 연관돼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인도에서 허왕후를 수행했다는 신하 '신보'도 등장한다. 
 

▲ 무척산 정상 인근 천지연.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이 붕어한 후 지금의 서상동에서 국장을 치르기 위해 묏자리를 팠다. 수맥으로 물이 자꾸만 새어나와 시신을 운구할 수 없었다. 왕실에서 어쩌지 못하는 상황일 때 허왕후와 함께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신보가 '가야에서 가장 높은 산에 못을 파면 능 자리의 물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신보는 거등왕의 왕비 왕모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김해 고을 가운데 가장 높은 무척산 산마루에 못을 파니 과연 왕릉자리의 수원이 막혀 물이 더 이상 새어 나오지 않았다."
 
가야와 가야불교의 내력을 간직한 천지연 옆에는 1940년대부터 한성동 목사 등이 일제에 항거 구국기도를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무척산 기도원이 있다. 주목할 부분은 기도원 자리가 옛날 통천사의 폐사지라는 점이다. <김해지리지>에 따르면 그 주변에 무척사라는 사찰도 있었다. 
 
현재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일하는 주영민 박사가 2004년 지표조사를 벌였다. 기도원 마당에 석탑 옥개석 1기, 탱주가 양각된 기단석 1기, 기단부 갑석으로 보이는 석재 1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 박사는 옥신석의 우주(모서리 기둥)가 생략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이후 석탑이리라고 추정했다. 그는 탑재와 함께 채집한 조선시대 기와, 분청자기 파편 등을 토대로 과거 천지연 일원에 모은암의 규모를 능가하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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