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노동 중시하는 사회 비판
“모두에게 일정 소득 보장이 해법”



"어떤 일 하세요?"

현대인들이 사람을 처음 만날 때 흔히 건네는 첫인사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일 이야기'로 시작하는 데서 보듯 오늘날 직업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다. 평범한 이 인사는 실업자, 비정규직, 3D산업 종사자 등에겐 달갑잖은 혹은 끔찍한 질문이다.

영국의 프리랜서 사회학자 데이비드 프레인은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 경제적 소득과 사회적 권리, 공동체 소속감을 결정하는 기준으로서 '일'의 지위가 지나치게 절대적이라고 비판한다. 실업 문제가 심각한 만큼 일자리와 노동의 비중은 날로 커지는 현대사회를 저자는 '일 중심 사회' '일 중독 사회'라 부른다.

책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일'은 '경제적 차원'의 노동을 말한다. 개인을 위한 자기계발, 공익을 위한 사회봉사 등 일의 층위와 유형은 다양하다. 현대 사회는 이 중에서 생산·소비 활동과 연결된 경제적 노동만 중시한다. 가사 노동이나 예술적·지적 활동은 경제적 기여도를 측정하기 어려운 탓에 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의 주변부에 머물 뿐이다.

프레인은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주류 정치는 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일자리 창출에만 집중한다. 신자유주의는 '부지런한 노동자'란 미덕을 부추기며 직장인을 더 많은 노동으로 내몬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선·악의 개념으로 바라보게끔 학습받아 왔다. 동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사계절 땀 흘려 일하는 개미는 바람직한 본보기다. 좋아하는 노래를 하며 자아를 추구하는 베짱이는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다.

한쪽에서는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고, 다른 한쪽에선 칼퇴근을 꿈으로 여기며 과로에 시달린다. 일하기 위해 값비싼 옷을 사 입고 할부금을 물어가며 자동차를 몰고, 옷과 자동차 그리고 일하느라 종일 비워 둘 집에 들어갈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향하는 현대인. 이런 삶이 과연 '정상'인지 그는 묻는다.

프레인은 노동 문제와 관련한 여러 학자의 개념과 이론을 통해 지금의 '일 중심적 생각'이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일에 매몰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며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5년 가까이 면담을 통해 만난 이들 중에는 노동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는가 하면 아예 일을 그만둔 경우도 있다. 이들이 결코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혁명을 꿈꾸는 자들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상대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축에 속하는 '게으름뱅이 연합' 회원들조차도 자신이 좀 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소박한 삶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 중독 사회'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프레인은 대안적인 사례를 무조건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늘어난 시간만큼 자기계발의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거나 실업자라는 수치심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이도 여럿이다. 일 중심의 '긴 잠에서 깨어난' 뒤 맞닥뜨린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은 존재한다.

프레인은 근래 불고 있는 '일·생활 균형' 캠페인을 넘어 앙드레 고르가 말한 '시간을 둘러싼 정치'를 해결책으로 제안한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일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의 노동시간을 얼마나 줄이고 어떻게 나눌지, 또 남는 시간은 자율적 활동을 위해 어떻게 쓸지를 사회적 토론으로 합의하는 '시간을 선택하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려면 지금처럼 소득 분배의 주요 기준으로서 '일의 지위'를 제거해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이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시에 퇴근해 가족과 단란한 식사를 하고, 주말에는 취미 생활과 봉사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삶. '저녁과 여가가 있는 생활'은 결코 비현실적인 풍경이 아니다. 일 중심 사회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고 대안을 찾다 보면 새로운 가능성, 다른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이상향적 발상이 변화의 출발점이다.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사회는 어떤 풍경일까. "어떤 일 하세요?"가 아니라 "뭘 좋아하세요?"로 첫인사를 건네는 사회가 아닐까.

 부산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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