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에서 내려다 본 진례면 담안리 상평마을 전경. 공장과 민가가 뒤섞여 있다.


 

일제강점기 때 웃들, 아랫들로 나뉘어
주민들 노력 인정받아 장수마을로 선정

수령 200년 나무에 해마다 당산제 지내
3년 전 집터 아래서 연자방아 발견해 전시
행방 모르던 고인돌, 공장에서 모셔 제사

난개발 맞서 공동체 유지하는 노력 진행
“출향인과 주민들 힘 모아 지켜나갈 것”

 


자동차 타이어가 굴러가는 곳마다 공장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줄지어 가는 화물차 뒤를 따라 천천히 달린다. 내비게이션이 좁은 골목길 사이로 우회전하라고 일러준다. 사방이 공장이다. 잘못 들어왔나 하면서 당황하는 순간은 잠시였다. 눈앞에 농번기를 맞아 모심기에 한창인 논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민가가 나타난다. 진례면 담안리 상평마을이다. 
 

▲ 수령 200년을 넘은 당산나무.

<진례면지>에 따르면 상평마을에는 석기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인돌 2기가 그 근거다. 다른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이던 조선 선조 40년(1607년)에 김해부사로 부임한 이경호의 후손이 경북 영천에서 이주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평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드넓은 평야의 중심에 위치해 들말(들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웃들 마을에는 상평, 아랫들 마을에는 하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상평마을에 사는 주민은 총 126가구다. 이중 절반인 60가구가 원주민이다. "60~90대 어르신만 79명입니다.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6명이 있어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려오지요. 마을을 보존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노력을 인정받아 2015년부터 매년 농촌건강 장수마을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종료되는 사업입니다." 상평마을 신대봉(55) 이장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마을의 자랑인 당산나무는 마을회관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주민 이종삼(82) 씨는 "수령이 200년은 됐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마을 어르신들이 목욕재계하고 당산제를 지낸다. 오래 전에는 200평 규모의 당산제 전용 논이 있었다. 그곳에서 수확한 쌀로 술을 빚고 떡을 만들어 하평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당산나무 근처에는 연자방아와 우물이 있다. 지금은 우물을 사용할 수 없도록 덮개를 씌워 놓았지만, 예전에는 하평마을 주민들도 함께 사용했다. 하평에서 난 물에는 철분이 너무 많아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자방아는 3년 전 집터에서 우연히 발견해 전시해 놓았다.
 
구경거리가 없었던 옛날에는 명절이 되면 주민들끼리 연극을 준비해 공연했다. 노인회 황도정(77) 회장은 "동네 청년들이 극본을 직접 만들어 밤마다 연습했다. 볼거리가 많이 없을 때여서 다른 마을을 찾아가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설날에는 마을 어르신들을 경로당에 모셔놓고 합동세배를 했다. 가난했던 시절 세뱃돈은 못 받아도 '건강해라'는 덕담 한마디에 힘이 났다"며 웃었다.
 

▲ 선박용 밸브제조 공장 안에 고인돌 상석 2기가 묻혀 있다.

이종삼 씨는 "어렸을 적엔 짚을 말아 공을 차고 놀았다. 겨울이 오면 토끼치기(자치기)를 자주 했다.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나 널뛰기를 했다. 풍물패 실력도 꽤 좋아서 지역대회에서 1~2등을 도맡았다"며 옛 추억을 회상했다.
 
마른 짚풀도 장난감이 됐던 그 시절, 밭 한가운데에 있던 평평한 큰 바위도 어린이들에겐 재미난 놀잇감이었다. 돌 표면에 구멍이 있어서 구슬치기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 그 바위가 개석식 고인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난 이후였다. 황 노인회장은 "중요한 유적인 줄도 모르고 뛰어놀았다. 경지 정리가 이뤄지면서 고인돌이 있었던 자리에 공장이 들어섰다. 고인돌은 아마 다른 곳으로 옮긴 것 같다"고 추측했다.
 
신 이장과 황 노인회장은 기억을 더듬어 고인돌이 있었던 장소로 향했다. 선박용 밸브를 제조하고 있는 ㈔효신산업 공장이었다. 사연을 들은 우경섭 대표이사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 작은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주민들이 찾던 고인돌 상석 2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우 대표이사는 "15년 전 공장을 짓는 데 방해가 돼 돌을 밖에 내놨다. 당시 공무원이 중요한 유적이라며 당산나무 앞으로 옮기자고 했다. 그때서야 고인돌인줄 알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길래 공장 안으로 들여 놓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아니겠나. 조상 무덤이라 생각하고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낸다. 이곳으로 온 시점을 기준으로 2월 마지막 날에 돼지머리와 떡, 고기를 사서 직원들과 함께 제를 치른다"고 덧붙였다.
 
우 대표이사는 "이런 정성이 통했는지 2013년엔 300만 달러 수출탑을 달성했다. 고인돌이 회사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의지하게 된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 3년 전 발견한 연자방아.

황 회장은 "늘 궁금했다. 땅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잘 모셔놓은 걸 보니 기쁘다"고 말했다. 신 이장은 "고인돌을 잘 보존해 줘서 감사하다.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치성을 잘 드려달라"고 당부했다.
 
제조공장에서 근무하는 외지인 외에 대다수 상평마을 원주민들은 벼농사를 짓고 산다. 예전에는 시설 재배로 포도나 딸기, 참외를 수확했지만 인력난 때문에 그만두고 기계식 농업을 한다. 마을 안에 설립된 크고 작은 공장은 50여 곳 가까이 된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가림막 바로 건너편에는 김해 테크노밸리산업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농촌이 공기 좋고 물 맑다고요? 이곳에서는 옛 말이 된 지 오래입니다. 공장이 자꾸 들어오니 소음공해도 점점 심각해집니다." 황 회장이 씁쓸한 듯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평마을 주민들은 난개발에 맞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대한노인회 경남연합회 경로당광역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고향의 집' 공모에 선정돼 경로당을 활용한 무료 숙박 제공 사업을 펼치고 있다(<김해뉴스> 지난 4월 19일자 2면 보도). 주민들은 또 깨끗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한다. 1년에 두 번씩 마을 할머니들이 대대적인 환경정화에 나서기도 한다.
 
신 이장은 "원주민은 줄어들고 외지인들이 계속 들어온다. 출향인들과 주민 모두 상평마을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마을기업을 세우거나 색깔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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