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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첫 의병장 넷 모신 충절의 서원… 순조 “그 이름 주작처럼 높도다”
(10) 사충단(四忠壇)
수정 : 2017년 06월 14일 (10:39:18) | 게재 : 2017년 06월 14일 10:32:09 | 호수 : 327호 12면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 임진왜란 당시 첫 의병이었던 김해 사충신을 모시는 송담서원 전경. 평소에 찾아오는 시민이 드물어 늘 한가하기만 하다.


선비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 선생
왜적 쳐들어오자 자발적 김해성 합류

신무기 무장한 상대와 사흘 동안 혈투
물밀듯 쳐들어 온 적병에 차례로 피살

세월 흘러 유림 뜻 모아 표충사 건립
여러 차례 폐쇄 거듭하다 문화재 지정
시내에서 멀어 찾는 발길 드물어 아쉬움



지난 1일은 국가에서 지정한 '의병의 날'이었다. 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애국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2010년 지정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으로 알려진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날짜를 골랐다고 한다. 그런데 의병의 날은 사실 닷새 정도 앞당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곽재우 장군 이전에 김해에서 최초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정복이라는 야망을 품고 14만 병력과 수백 척의 병선으로 하여금 현해탄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게 했다. 당시 조선은 왜군과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왜군 1군 1만 7000명은 4월 13일 부산포에 도착하자마자 부산진성을 함락했다. 부사 송상현이 분투했지만 동래성도 함락되고 말았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백성들은 공포에 떨며 모두 산 속으로 피난가기 바빴다.
 
김해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다음 공격지였다. 김해 부사는 경남의 여러 부사, 군수 들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지역의 유지인 송빈(1542~1592)과 이대형(1543~1592)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냈다.
 

▲ 사충신의 위패를 모신 표충사. 매년 음력 4월 20일 향례가 봉행된다.


▲ 향례 도중 한 제관이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송빈은 청주송씨의 집성촌인 진례면 담안마을에 살았으며 높은 덕망과 학식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선비였으며, 천성이 맑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의병으로 나서겠다고 마음을 정한 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나는 비록 벼슬이 없으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나라가 지금 위급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이후 의병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써서 여러 마을에 붙였다. 지금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격문을 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의병들이 모였다. 이들은 김해성으로 들어가 부사 서예원과 합심해 왜적에 맞서 싸우자고 결의했다.
 
이대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김해성을 지키겠다고 결단했다. 그는 마을을 돌며 의병 100여 명을 모아 4월 15일 김해성으로 나아갔다.
 
김득기(1549~1592), 류식(1552~1592)도 가세했다. 김해 부거인리(지금의 외동)에서 태어난 김득기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시끄럽자 입신출세할 때가 아니라며 향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왜군이 김해성에 쳐들어오자 싸우기로 결단했다. 당시 17세였던 6대 독자 아들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만류했다. 김득기는 도포 한 벌과 머리카락 한줌을 잘라 주며 아들과 작별했다고 한다. 류식은 어린시절 과거를 준비하며 공부하다 벼슬에 뜻을 버리고 책과 벗하는 선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왜군이 월당진(지금의 대동면 월촌리)을 건너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라며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왜군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1만 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해로 쳐들어 왔다. 이들은 4월 18일 김해성을 포위하고 총, 화살, 화포로 맹공격을 퍼부었다.
 
김해 병사들과 백성들은 함께 힘을 모아 싸웠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엄청난 수의 왜군에 조금씩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지원병을 이끌고 온 초계군수는 슬금슬금 달아났다. 김해부사인 서예원 역시 도망간 군수들을 잡으러 간다고 말한 뒤 진주성으로 달아났다.
 
사충신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부사까지 도망을 쳐 더 열악해진 상황에서도 백성들과 함께 김해성을 지켰다. 왜군들은 김해성에 쳐들어오기 위해 보릿단으로 성벽 아래에 단을 쌓기 시작했다. 그 단을 밟고 성벽을 타고 넘어왔다. 4월 20일 성 안으로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온 왜군의 공격에 의병들은 줄줄이 목숨을 잃었다. 쓰러진 의병들이 시체 언덕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뤘다고 한다.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투항을 권고하는 왜적에 맞서 싸우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진남문에 있던 송빈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몸을 피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끝까지 싸우다, 절명시를 읊은 뒤 성 내 큰 돌 즉 김해재래시장에 있는 서상동 지석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 사충신 비석이 서 있는 사충단.

▲ 사충신 비석.

아무도 모른 채 역사의 어둠에 파묻힐 뻔 했던 사충신과 백성들의 충의는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양업손이라는 사람을 통해 전해졌다.
 
처음부터 열세였던 싸움에 목숨을 건 이들의 희생은 무의미한 게 아니었다. 사충신이 사흘 동안 김해성을 지킨 덕분에 진주성은 전열을 다질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진주성도 결국에는 함락됐지만, 김해·창원·진주를 지나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향하던 왜군의 발걸음을 늦출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유림들을 중심으로 사충신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나라에서도 이들의 공을 인정했다. 송빈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3년(1600년) 공조참의로 추증됐다. 고종 12년(1875년)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됐다.
 
1707년 이순신의 후손인 이봉상은 김해부사로 와서 송빈의 사적을 보고 감탄해 사당을 지어 봉향하자고 조정에 상소했다. 이듬해에는 유림들과 힘을 모았고 1716년 주촌면 양동리에 표충사를 세웠다.
 
표충사는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741년 서원 철훼 사업 때 사라지게 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서원이 많았다. 서원에서 향례를 지내는 일이 백성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해서 당시 기준으로 '최신 서원'을 없애기로 했다. 표충사는 1708년 무자(戊子)년에 건립됐다. 당시 관리가 조정에 무자(戊子)년을 무술(戊戌)년, 즉 1718년으로 잘못 보고하는 바람에 훼철 대상에 포함돼 사라졌다고 한다.
 
표충사가 없어진 후 경상도 유림들은 연이어 표충사 재건 상소를 올렸다. 그 덕분에 40여 년 만인 1784년 진례면 신안리에 재건될 수 있었다. 이 때 이대형과 김득기를 더해 삼충신을 향사했다. 처음에 사호(건물 이름)는 송빈의 호를 딴 송담사였다. 때로는 삼충사라고도 불렀다. 송빈 선생의 12대손이자 경남향토사연구위원인 송춘복 씨는 "류식의 부친이 나라에 죄를 지어 아들인 류식까지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유림들이 생각을 바꿔 사충신 모두를 모시게 됐다"고 설명했다.
 
송담사는 1801년 순조의 서원 철폐령 때 다시 철폐됐다. 그러다 유림들이 20년 동안 복원 상소를 올린 덕에 1824년 송담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됐다. 1833년에는 순조가 치제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다. 치제문은 '의는 웅어(熊魚)를 가리듯 의를 취하고/ 공이나 업적은 염두에도 없었으니/ 우리나라의 큰 고개 이남에서/ 그 이름이 남방의 신 주작처럼 높도다'라며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송춘복 씨는 "김해에는 임금이 내린 문서가 거의 없다. 순조 임금의 치제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잘 남아 있다면 선조국문유서와 함께 귀한 보물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지어진 송담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철폐됐다가, 1871년 고종의 명으로 삼충신에 류식을 더해 사충신을 기리는 뜻에서 묘단인 사충단을 세웠다. 사충단은 1983년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로, 1990년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됐다.
 
김해시는 1995년에 사충단 성역화사업을 실시해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로 이전했다. 송담서원, 표충사, 사충단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시민들이 흔히 사충단이라고 부르는 곳은 실제로는 송담서원이다. 서원의 여러 건물들 중 사충신을 기린 비석을 감싼 작은 비각이 사충단이다. 표충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4월 20일 사충신을 기리는 향례를 올린다.
 
이제는 더 이상 서원이 철폐될 염려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원이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고 서원으로 가는 길이 좁고 험해 이곳을 찾는 김해시민들의 발걸음은 드물다. 아예 사충신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유림들과 후손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한다.
 
김득기 선생의 13대손인 김진호(65) 씨는 "동래부사인 송상현 선생은 한나절 동래를 지켰지만 충의를 기려 광장도 만들고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김해의 사충신은 관리도 아닌 일반 선비이면서 의병으로 나서 더욱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송춘복 씨는 "송담서원으로 가는 길만이라도 확장하고 시민들에게 사충신을 많이 알려 후손들이 많이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사충단(四忠壇) / 경남도 기념물 제99호.
사충단 가야로405번안길 22-9(동상동16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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