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가야불교 뿌리를 찾아서
허황옥 오빠 장유화상, 불도 닦으며 수행했다는 가야불교 발상지(12) 장유사(長遊寺)
  • 수정 2017.06.21 09:33
  • 게재 2017.06.21 09:30
  • 호수 328
  • 12면
  • 심재훈 기자(cyclo@gimhaenews.co.kr)


 

   
▲ 불모산 용지봉 중턱에 자리잡은 장유사. 가장 앞쪽 건물은 대웅전이며, 그 뒤로 삼성각·행선실 등의 가람이 배치돼 있다.


신행길 동행한 허보옥, 최초로 사찰 창건 
절 인근 토굴서 수도했다는 전설
인도 역사들 쌓았다는 석축 위 토막 지어

고려말 양식 사리탑엔 석물만 남아 있어
임진왜란, 한국전쟁 탓 과거 흔적 훼손돼
1980년대 불사 시작한 덕 현재 모습 재건

<삼국유사> 등 서적에는 사찰 기록 없어
해공스님 “폭넓은 견지에서 더 연구 필요”



김해지역 여러 사찰들의 연기설화는 가야불교를 전래한 인물로 장유화상(長遊和尙)을 지목한다.
 
설화에 따르면 장유화상의 본명은 허보옥이다. 아유타국 왕자 허보옥은 동생 허황옥(허왕후)의 신행길에 동행해 가야까지 왔다. 가야에 도착한 후 산에 들어가 부귀를 뜬구름 같이 보며 불도를 닦아 장유화상이라 불렸다. 그는 허황옥의 오빠여서 왕족이지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입적했다는 의미에서 '보옥선인(寶玉仙人)'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장유화상은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수행해 신선이 됐고, 이후 지리산에 들어가 일곱 왕자를 성불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해 은하사, 장유사뿐 아니라 경남 하동 칠불사 등에도 장유화상 연기설화가 남아 있다.
 
장유사는 장유화상이 허황옥을 따라 가야로 온 뒤 최초로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해진다. 장유화상의 이름을 고스란히 담은 장유사는 그가 실존인물이라는 생각하는 지역민들에게 오랜 믿음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재야학자인 허명철 조은금강병원 이사장은 "장유의 지명, 산 이름, 사찰 이름은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일찍이 인도에서 들어와 불교를 직접 가락국에 전하였음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 고려 말 양식으로 추정되는 팔각원당형의 장유화상사리탑.

장유사는 장유 대청리 불모산(佛母山) 해발 730m 용지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다. 대청계곡을 지나 2㎞ 넘게 산길을 달리면 율하동을 중심으로 하는 장유지역 전체를 굽어보는 명당에 비교적 최근 조성된 장유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는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절을 지을 당시 세웠다는 장유화상사리탑이 남아 있다. 절에서 오른쪽 60m 아래에는 장유화상이 최초로 수도했던 토굴이 있었다고 한다. 장유사 입구의 사라진 절터는,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장막을 치고 합혼한 곳에 세운 왕후사 터라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절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으로 부침을 겪은 경남 일대의 수많은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장유사도 과거의 흔적은 많이 훼손되고 단절돼 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운파, 염담, 우담 등의 스님들이 절에 머물면서 수행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해방 직후 혼란기와 한국전쟁 이후 완전히 퇴락해 한 때는 과거의 모습을 잃어버린 사찰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는 양철지붕을 얹은 임법당(간이법당) 몇 채에 스님들이 모여 수행해 '장유선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장유선원과 주변에는 옛 사찰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단석이나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불사가 시작돼 현재 장유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장유사는 본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장유화상 영정을 모신 삼성각, 신자들을 맞는 행선실, 공양간 등 모두 7동으로 구성돼 있다. 본전인 대웅전 바로 옆에는 과거 탑의 흔적을 보여주는 탑재가 일부 모여 있다. 과거의 석탑으로 보이는 3층 탑신석과 옥개석, 노반석, 건물의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장유화상사리탑의 존재는 장유화상이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각인된 인물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경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지정된 이 사리탑은 장유화상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었던 석조물이다. 양식과 조각 수법을 볼 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리탑은 팔각원당형이다. 사각형 지대석 위에 연화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지금은 부도 상단에 새로운 탑재가 끼어 있는 등 완전한 원형은 아니다. 장유사 주지 해공스님은 "장유화상사리탑은 고려 말 양식의 사리탑이다. 임진왜란 때 사리를 도굴당해 현재는 석물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 장유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장유화상의 영정. 삼성각 안에 모셔져 있다.

장유화상사리탑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지만 사리탑 왼편에 있는 장유화상사적비를 통해 사리탑의 내력을 유추할 수 있다. 1915년 세워진 이 사적비는 장유화상이 불모산에 사찰을 개창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이 비문에는 '장유화상의 속명은 허보옥이며 아유타국의 태자이자 허황옥의 남동생이다. 함께 수로왕이 있던 시기인 48년 가락국에 건너와서 장유산에 연화도량을 열어서 불법을 전했다. 장유화상이 말년에 가락국의 일곱 왕자와 함께 방장산(지리산)에 들어가 입적했다'는 문구도 보인다.
 
장유사에는 일반 관광객은 찾기 힘든 역사적 흔적이 있다. 바로 허왕후 일행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석축이다. 인도에서 건너 온 허왕후, 장유화상 일행 중에서 힘센 역사들이 골짜기 끝에 바위를 쌓아 높이 5m, 폭 15m의 큰 축대를 조성해 평평한 땅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장유사 마당과 행선실 사이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아래로 60m 가량 내려가면 스님들이 요사체(생활공간)로 쓰는 토막(움막집)이 있다. 토막은 허왕후 일행이 만들었다는 석축 위에 만들어졌다.
 
해공스님은 "돌을 깨거나 깎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축대를 만든 형태로 볼 때 일제강점기나 조선시대 훨씬 이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설화가 말하듯 허왕후 일행이 조성했다고 보는 게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 허왕후 일행 가운데 힘센 역사들이 쌓아올렸다고 하는 석축.

지금 축대 위에 서 있는 토막은 비교적 최근에 새로 지었다. 해공스님에 따르면 1960~1980년대 장유사는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개방됐다. 한 때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곳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가야불교 기록 가운데 가장 앞선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장유화상은 고려 말이나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은 1708년 명월사 승려 증원이 찬술한 '명월사 사적비'에 처음 나온다. 이후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 등 조선 후기 기록에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이 때문에 인제대 이영식(역사학과) 교수, 합천박물관 조원영 관장 등 가야사 전공자들은 '장유화상이 조선 후기 민중들과 사찰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는 '왕후사가 생기고 500년 후에 또 장유사를 설치했다. 그 절에 납부된 전시(田柴)는 모두 300결이었다. 장유사의 삼강(三剛)이 '왕후사가 이 절의 시지(柴地) 동남쪽 표식 내에 있다'고 하면서 왕후사를 폐하고, 전장(田莊)을 만들어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소를 기루는 축사를 설치했으니 슬픈 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451년 즉위한 가야의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를 건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이 책대로라면 장유사는 10세기 중반 건립됐고, 왕후사의 북서쪽에 위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영식 교수는 <김해뉴스>에 연재했던 '신김해지리지'에서 '장유사가 15세기 장유산에서 폐사된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주장했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불모산도 처음에는 부처와는 무관한 부을무산(夫乙無山)이었다. 불모산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69년의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다. 1454~1469년 사이에 장유산에서 폐사됐던 장유사를 대신해 대청리에 장유사가 세워지면서 생긴 절의 내력이다. '부을무'가 '불모'로 되었고, 오래 놀았다는 얘기도 장유화상의 글자 뜻과 계곡이 어울려 만들어진 전설이었다. 사리탑의 형식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고, 사리탑을 지키고 선 17m 전나무도 200세 정도라 한다. 사연을 적은 비석도 1915년 5월에 건립된 것이다.'
 
해공스님의 생각은 장유사와 장유화상을 부인하는 이영식 교수 등의 주장과 조금 다르다.
 
해공스님은 "수많은 전란과 그로 인한 기록의 소실 때문에 남아 있는 역사적 흔적만으로는 어느 사찰이 가장 먼저 생겼는지, 가야불교의 실체가 무엇인지 단정지어 말하기 힘들다. 옛 가야지역에 불교가 전래됐다는 사실 자체를 지어낸 이야기로만 치부하는 주장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좀 더 폭넓은 견지에서 유물과 유적뿐 아니라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설화, 지명 등을 놓고 미시적인 연구를 진행할 때 가야불교의 본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심재훈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부대찌개 3인분을 먹으면'… 모르면 '아싸' 되는 펭귄문제 정답은?'부대찌개 3인분을 먹으면'… 모르면 '아싸' 되는 펭귄문제 정답은?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비밀글로 설정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