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력·경제력 대신 ‘공급망’이 힘
국가·지리 중심 지도 이제 무의미




세계지도를 펼쳐 보자. 오대양 육대주와 200여 개 국가가 형형색색의 면과 선(국경)으로 표시돼 있다. 실제 세계의 모습은 지도와 많이 다르다. 지도에 아프리카 대륙과 엇비슷한 크기로 보이는 그린란드는 실제로는 지도 크기의 14분의 1에 불과하다. 우주여행사가 지구 상공에서 찍은 사진에는 국경이 없다. 대신 거대한 도시, 초대형 교량,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등이 눈에 띈다. 지리적 위치를 중심으로 그려진 지도가 정작 실제로는 '지리 정보'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제관계 전문가인 파라그 카나는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는 단순히 지리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외교 관계를 아우르는 세계의 그림이다. 그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국가 운명이 결정되는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세계화로 대변되는 소위 '연결 혁명'이 전 분야에 걸쳐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오늘날, 이제는 '연결성'이란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커넥토그래피 혁명>이라는 책 제목은 '연결(Connect)'과 '지리(Geography)'라는 단어를 합성했다. 책에 따르면 연결의 시대에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공급망'에서 나온다. 공급망이란 자원·아이디어를 가공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거래하는 전체 체계를 일컫는다. 국경을 넘나드는 고속도로와 철도, 가스관과 송유관, 해저인터넷망, 바닷길과 하늘길, 무역협약도 공급망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공급망의 관점에서 보면 기존 '면'(국가 또는 지리) 중심의 지도는 무의미하다. 대신 '점'(도시)과 '선'(공급망)으로 연결된 새로운 세계 지도가 탄생한다.

카나의 생각은 국제관계를 다루는 전통적인 정치·군사·외교적 관점을 뒤집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할 만하다. 연결과 공급망 중심의 관점은 경제 분야는 물론 오랜 지정학적 갈등을 해결하는 새로운 해법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의 대표적인 관심사 중 하나는 북한 문제다. 그는 2012년 북한에 갔을 때 이미 국경지대와 특별경제구역 등을 통해 외부와 북한체제의 연결이 진행 중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북한을 제재가 아니라 공급망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게 전쟁 위협을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그는 제안한다. 풍부한 광물자원 등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와 연결돼 북한 전체의 부가 증대되면 체제 붕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북핵 문제의 실마리도 풀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연결의 시대에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다는 게 카나의 기본 전제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근시안적이며 틀렸다고 비판한다. 교역량이 너무 적은 게이 불공정 무역보다, 인터넷 접근이 너무 어려운 게 디지털 격차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는 이야기다.

다만 '무한 세계화'나 '고삐 풀린 자유시장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물리학의 '흐름'과 '마찰'이란 역학 개념에서 보면 장기적으로 흐름이 마찰을 이기지만, 투기적 자본통제, 국내 산업 경쟁력을 위한 제한적 자유화, 공공서비스 과부하를 막기 위한 이민 제한 등 '합리적 마찰'은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열렸던 출간기념 대담에서 카나는 세계화 때문에 몇몇 국제적 도시로 부가 집중되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는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세계화나 글로벌 네트워크가 아니라 해당 국가와 정부"라고 말한다. 특정 도시나 지역으로 부가 집중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정부가 분배와 재투자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 GDP(국내총생산)의 25%는 뉴욕과 로스엔젤레스 두 도시가 차지하고 있다. 반면 독일에서는 베를린, 함부르크, 쾰른, 뮌헨, 프랑크푸르트 등 중견도시들이 함께 성장하며 부유해지고 있다. 어느 쪽이 올바른 '연결의 방향'인지, 현재 양국의 상황을 보면 답은 정해져 있다. 인구의 절반, 자본의 90%가 수도권에 집중된 우리나라에 특히 시사점을 던지는 대목이다. 저자는 연결성의 모범도시로 서울을 거론하지만, 롤모델 국가는 우리나라가 아닌 독일을 꼽는다.

부산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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