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 필름, 종이 등 열풍 원인 분석
‘돈 되는 사업’ 앞으로 지속 가능성



지름 12인치(약 30㎝), 분당 33.3회 회전. 45분 남짓 노래를 담을 수 있는 둥근 플라스틱 판. 흔히 LP라 불리는 '레코드판'은 1948년 세상에 나온 이래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음원을 듣는 일상 속에서 LP의 인기는 더 높아지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2007년 99만 장이었던 LP 판매량이 2015년 무려 1200만 장으로 늘었다. 전체 음반 판매 수입의 4분의 1을 LP가 차지할 정도다. 가히 'LP의 르네상스'라 할 만하다.

캐나다의 논픽션 작가인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 반격>에서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아날로그 상품과 아이디어가 인기를 끄는 현상의 원인과 가치를 분석한다. 저자는 LP, 종이, 필름, 보드게임 등 아날로그 물건 열풍이 불고 있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 관련자들을 취재한다. 생산자와 유통자, 소비자를 두루 만나며 내린 결론은 아날로그의 반격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색스가 생각하는 아날로그의 가장 큰 매력은 '즐거움'이다. 레코드판은 디지털 음원보다 듣기에 번거롭고 음질도 떨어지지만, 사람들은 음악을 듣기까지 참여하는 과정에서 더 만족감을 느낀다. 서가에서 앨범을 골라 턴테이블 바늘 위에 정성스레 내려놓는다. 1초 동안 침묵이 흐르고, 레코드판을 긁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흘러나오는 음악. 이 과정에서 손과 발, 눈과 귀, 때로는 먼지를 불어내기 위해 입까지 동원된다. MP3로 들을 땐 결코 누릴 수 없는 오감의 풍성한 경험이다.

종이 매체와 필름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종잇장을 넘길 때의 촉감과 잉크 냄새는 전자책이 가지지 못한 실재적 감각이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으면 종이로 인화해 손에 쥘 수도, 앨범 사진집으로 남길 수도 있다. 물건의 실체가 있다는 점은 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만의 장점이다.

오늘날 아날로그의 유행이 디지털 생활의 피로감으로 인한 일시적인 회귀 현상이란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아날로그 상품 구매층의 대부분이 젊은이라는 점에서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거대한 흐름"이라고 말한다. 성인들과 달리 지금의 10대들은 아날로그 세계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다. 디지털 음원보다 훨씬 비싼 LP판을 사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책을 사고, 무겁고 불편한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행위는 기성세대, 또는 또래 친구들과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소위 '쿨'한 경험이다. 어른들이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좇아 스마트폰과 온라인 세상에 열중하듯, 그 반작용으로 젊은이들은 아날로그적 생활 방식을 동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이 앞으로 더 확대·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주요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 출판, 유통, 제조,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아날로그적 아이디어가 실제 거대한 수익 창출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온라인 서점 아마존은 미국의 주요 대도시에 오프라인 매장을 속속 차리고 있다. 애플 제품을 가장 비싸게 파는 오프라인 가게엔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다. 한동안 사라졌던 LP 레코드 가게도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미국 디트로이트에 들어선 시놀라 시계 공장은 아날로그 산업 분야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자동차 산업이 쇠락하며 극심한 실업에 시달렸던 이 도시에서 로봇이 아닌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날로그 시계 공장은 수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동남아시아 등지의 값싼 노동력을 쓸 법도 하지만 시놀라는 미국인 고용을 고집한다. 시놀라 브랜드가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건 디자인이나 가격이 아니라 '미국에서 미국 사람이 만든 미국 시계'라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놀라는 오바마 대통령이 애용하는 시계로 더욱 유명세를 탄다.

그렇다고 그가 디지털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완전히 아날로그적으로 사는 것도, 완전히 디지털적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둘 사이의 균형을 찾자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부산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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