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산에서 내려다본 신안마을 전경. 공장이 하나도 없는 아파트밀집단지 인근에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팔판산 기슭 위치한 그릇 굽던 가마터
 지금도 땅 깊숙이 파면 조각들 발견돼

 남양홍씨, 경주김씨 등 다양한 성씨 살아
 물 많고 터 좋은 덕분 부자 된 사람 넘쳐나
‘판서 8명 나는 명당’ 유명세 고시생 몰려

 1960년대 북한 피난민 호랑이 잡아오기도
 정월대보름엔 걸궁패 꾸려 풍물놀이 즐겨





"신안마을은 팔판산 기슭에 자리한 산 좋고 물 좋은 산촌마을입니다."
 
장유 관동동 팔판마을 아파트단지 앞에는 왕복 6차선인 율하로를 사이에 두고 신안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신안계곡 방면으로 좁은 샛길을 따라 우회전하면 고즈넉한 신안마을회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빽빽한 아파트 단지 너머로 보이는 한적한 자연마을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신안마을은 옛날부터 '그릇을 굽던 곳'이라 하여 '사기점(沙器店)'이라 불리다가 순조 때 이름을 바꿨다. 마을에는 사기를 굽던 장인들이 거주했고, 신안천 주변에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기점 기록은 조선시대 전국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책인 <호구총수>에 남아 있다. 1789년에 작성된 책 내용에는 '김해 유등야면 사기점리'로 명칭이 나타나 있다.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땅 속을 깊숙이 파 보면 크고 작은 사기조각들이 나온다"고 말한다.
 

▲ 신안마을 입구에 세워진 안내비석.

<장유면지>에 따르면 신안마을에는 집성을 이루는 성씨가 없다. 남양홍씨, 경주김씨, 김해김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살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성씨는 남양홍씨다. 덕정마을에서 거주하던 경주김씨들이 들어온 시점은 1650년대로 추정된다. 이후 충청도에 살고 있던 김해김씨의 선조가 들어왔다.
 
논농사로 먹고 살던 옛날에는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 특성상 물이 풍족했다. 마을에서 9대째 살고 있는 신안마을 노인회 김영호(73) 회장은 "사흘만 가물어도 나락이 타지만, 신안마을에서는 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땐 농사만 잘 지으면 부자가 됐다. 장유의 34개 마을 중에서 신안마을과 모산마을이 가장 잘 사는 동네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마을 터가 좋은지 이곳에 와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어렸을 적에는 신안계곡 근처에 있는 300평 넘는 바위 밑 음지에서 놀았다. 옷을 벗어놓고 들어가 살 정도였다. 나무뿌리까지 캐다가 불을 땠을 시절에는 민둥산에 소를 풀어놓고 용 웅덩이에서 목욕하고 놀았다. 용이 놀다갔다고 전해질 만큼 깊고 큰 웅덩이였다"고 말했다.
 
모두가 가난했던 1950년대, 마을 사람들은 섬유용 삼베를 얻기 위해 대마 농사를 지었다. 마을에는 삼베를 삶는 작은 터도 있었다. 큰 솥에 넣어 삶다가 계곡에 던져 식힌 후 베틀을 이용해 삼베를 짰다. 그렇게 얻은 삼베 원단은 비싼 가격에 팔기도 했다.
 
현재 신안마을에는 6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이중 원주민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1996년 신도시 개발이 시작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신안마을에도 건물들이 신축됐다. 새로 지은 주택과 식당, 카페 등 가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농사를 짓고 살던 원주민들은 개발이 시작되자 마을을 떠났다. 외지인의 유입이 늘자 신안마을은 1구와 2구로 나눠졌다.
 

▲ 과거 마을주민들이 당산나무 밑에서 휴식하는 모습과 걸궁패를 꾸려 풍물놀이를 하는 청년들. 사진제공=신안마을

마을을 오랫동안 지켜 왔던 당산나무 두 그루와 돌탑은 지금의 마을 앞 신호등 자리에 있었지만, 6차선 도로를 건설하는 바람에 사라졌다. 김 회장은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을 시절, 논을 매고 점심을 먹고 나면 당산나무 그늘에 누워 쉬곤 했다. 나무가 워낙 커 마을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개발이 시작되면서 마을 안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수령이 워낙 오래 돼 불가능했다"며 아쉬워했다.
 
예로부터 팔판산은 '여덟 명의 판서가 나는 명당'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때문에 산자락에 위치한 신안마을에는 고시생들이 많았다. 이상근(57) 이장은 "20년 전까지 마을 안에 고시원이 많았다. 사법·행정고시를 공부하던 수험생들이 수두룩했다. 그때 공부했던 사람들이 시험에 합격해 추억 삼아 마을을 찾아오기도 한다"며 껄껄 웃었다.
 
신안마을 표지석에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지게목발 받치고 논밭을 일구고, 밤이면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으며…'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실제로 1960년대 초 신안마을에는 한바탕 호랑이 소동이 일어났다. 마을 주민들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에서 피난온 강도준 씨가 호랑이를 잡았다고 했다. 강 씨는 밤마다 잠꼬대로 짐승소리를 낼 만큼 수렵에 이름난 인물이었다. 그는 굴암산에서 올무에 걸려 죽어 있는 호랑이를 들쳐 메고 마을로 내려왔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호랑이를 어떻게 업고 왔는지 아직까지도 신기해. 죽은 암놈을 따라 수놈이 쫓아올까 봐 얼굴이 노래져서 왔다니까. 두려움에 떨던 강 씨는 사람들을 보고 '아이고 이제 살았다'며 한숨 내려놨지. 마을회관에 호랑이를 내려놓자 사람들이 와서 수염을 잡아당겨 보고 구경하기 바빴어. 진례에 살던 사람이 호랑이를 사서 가져갔는데 지금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김 회장이 옛 기억을 더듬으며 설명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달집태우기를 하고, 음달·양달로 편을 나눠 줄다리기를 했다. 여성들은 널을 만들어 뛰거나 짚을 땋아 당산나무에 걸어 그네를 탔다. 이 놀이가 시작될 때면 마을 청년들은 걸궁패를 꾸려 풍물놀이를 했다. 김 회장은 "진해 벚꽃장에서 시범공연을 했다. 사람들이 벚꽃 구경은 안 하고 걸궁치기만 볼 정도로 굉장히 잘 했다"며 자랑했다.
 

▲ 굴암산으로 가는 등산로.

마을 안에는 굴암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조성돼 있다. 이 이장은 "주말이 되면 하루에 1000명 이상이 방문한다. 굴암산 등산로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그늘이 많아 햇빛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면 거가대교와 거제도가 한 눈에 보이고 날씨 좋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마을에 하나쯤은 있다는 공장도 신안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이장은 "공장이 들어선다면 주민 모두 반대할 것이다. 앞으로도 공기 좋고 물 좋은 마을로 지켜나갈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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