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체력이 떨어지고 면역기능이 저하됐을 때, 또는 자녀들의 성장 촉진에 신경이 쓰일 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삼'이다.

인삼은 수천 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포괄한 동북아시아에서 애용돼 왔다. 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인삼은 세계 여러 곳에서 자라지만, 우리 땅에서 나는 토종인삼은 고려시대부터 '고려인삼'이라 하여 뛰어난 약효와 품질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원래 우리나라 인삼은 깊은 산속에 자생하던 식물이었다. 지금의 산삼처럼 채굴해 이용했다.

17세기 초반에 완성된 <동의보감>에 나오는 인삼은 '신초(神草)'였다. 지금처럼 재배한 인삼이 아니라 산삼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삼 교역량 증가와 민간의 공납 부담 증가 때문에 채 무분별한 채굴이 자행됐다. 이로 인해 산삼 부족 현상이 나타나자 점차 인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삼을 지극히 사랑했던 임금은 바로 조선의 영조였다. 그는 수시로 발생하는 지독한 복통과 가려움 때문에 평생 동안 고생했다. <승정원일기>에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나에게는 원래부터 갑작스럽게 생기는 복통이 있는데, 이 복통이 다시 찾아왔다'라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복통이 너무 괴로워 뜸 치료를 받았다. 이미 100장의 뜸을 떴으니, 나는 이제 뜸 치료를 그만하고자 한다'라는 내용도 나온다.

영조는 지병인 복통을 치료하기 위해 피부가 타들어 가는 뜸을 수백 번 뜨는 고통도 감내했다. 뿐만 아니라 가려움으로도 상당히 고생했다. 온갖 약물과 온천수로 피부를 관리했지만 완치하지 못했다. '온천수를 운반해 오는 것이 백성들에게 큰 민폐가 될 것 같다. 많이 길어 오지는 마라'라는 명령도 나온다.

이렇게 영조를 평생 괴롭혀온 복통과 가려움을 깔끔하게 치료한 처방이 있었다. 인삼, 백출, 건강, 감초로 만든 '이중탕'이란 처방이었다. 영조는 65세 때 고질적인 복통을 해결한 후 '이번에 환후가 나은 것은 이중탕의 공이다. 이제 이중탕에 ‘이중건공탕’이라는 이름을 특별히 하사하겠다'라고 칭송했다. 그는 이후 인삼을 추가해 계속 복용했다. 83세로 승하하던 해까지 식욕부진, 복통, 구토, 가려움증이 있을 때면 매번 인삼을 중심으로 한 처방을 수시로 복용해 치료했다.

영조는 심지어 74세부터는 백발의 머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새로 생겨나 모인 신하들 모두를 놀라게도 했다. 그는 '건공탕 세 첩을 복용하니 맥이 청년과 같아지고, 한 첩을 또 복용하니 검은머리가 새로 자라며, 또 한 첩을 또 복용하니 걸음걸이가 옛날과 같아지도다'라며 효능을 칭송하는 '비망가'까지 내렸다. 신기한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2세 무렵부터 빠졌던 치아가 새로 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하들은 종사의 기쁨이라고 하면서 이중건공탕을 계속 권했다.

즉위 49년을 맞은 1773년 80세가 된 영조가 신하 홍봉한을 가까이 불러 두피가 근지럽다면서 살펴보게 했다. 홍봉한은 "머리카락의 삼분의 일이 검은색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때 영조는 '내가 병술년(1766년) 이후로 복용한 인삼이 100근(60kg)이나 된다'라고 했다.

이렇게 인삼의 대단한 효과를 몸소 보여준 영조의 영향은 다음 왕위를 받은 정조의 건강관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부정적 영향이었다.

즉위 24년째였던 1800년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전에 여름철 더윗병 때문에 육화탕 세 첩을 복용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인삼 다섯 푼이 들어가 있었다. 한 첩을 복용하자 바로 코가 막히기 시작했고, 두 첩을 복용하자 코에 종기가 났다. 그 뒤로 가슴과 등에 종기가 퍼져 버렸다'면서 '인삼이 든 탕약을 나에게 먹이지 말라'고 명한다. 이러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인삼의 효능을 굳게 믿고 있던 어의들은 사흘에 걸쳐 다량의 인삼이 들어간 탕약을 투여했다. 결국 종기의 심각한 악화와 얼굴의 발진이 나타난 지 나흘 만에 정조는 승하하고 말았다. (다음 편에 계속)김해뉴스


 




조병제 한의학·식품영양학 박사
부산 체담한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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