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안씨 집안이 160년 간 대대로 살아온 염수당. 오래된 집이지만 비교적 깔끔하게 보존돼 있다.


1854년 세워져 2006년 경남도문화재 지정
700평 대지에 대문채, 사랑채 등 건물 5채

두 사랑방 앞에는 ‘예강서원’ 편액 설치돼
강우학맥 주도하며 후학 키운 안언호 기려

도자료 279호 <염수당 고문서> 귀중한 자료
명사들과 주고받은 편지, 분재기, 혼서 등

무릎보다 낮은 굴뚝엔 ‘남 배려하는 마음’


수백 년간 한 성씨가 한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을 집성촌이라고 부른다. 진영읍 안평마을 광주안씨, 진영읍 평지마을 함안조씨, 진례면 담안마을 청주송씨, 장유 용산마을 평양조씨, 장유 수가리 김해허씨, 장유 덕정리 전주이씨 등 김해 곳곳에도 조상 때부터 대대로 이어온 집성촌이 있다.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는 성씨마다 다르지만 대개 조선시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수백 년간 친척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한 가족도 국내·외로 흩어져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당연히 집성촌의 모습도 사라져가고 있다.
 
약 300년 전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에 형성된 광주안씨 집성촌은 과거의 모습을 여전히 잘 담고 있는 곳이다. 경남 함안에 살던 안경지 선생이 부인 광산김씨의 집안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던 시례리로 들어오면서 김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광주안씨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11대째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이 마을은 입구부터 고즈넉한 과거로 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김해 외곽에 있어 시민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른 지역의 한옥마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마을을 둘러싼 오래된 고목들과 어깨 높이의 흙담길, 기와로 올라간 한옥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눈길을 붙드는 멋스런 한옥 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될 건물은 '염수당'이다. 2006년 경남도기념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연마하고 수련하다'는 뜻을 지닌 염수당은 광주안씨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1854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벌써 160년을 넘은 건물이다.
 

▲ 조선시대 안언호 선생이 명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노산장묵'(왼쪽), 조선시대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고문서.

염수당은 약 700평 규모의 대지에 대문채, 사랑채, 안채, 가묘, 고방채와 기타 3동의 부속채로 이뤄져 있다. 염수당 대문을 열면 왼편에 1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소나무가 있다. 정면으로는 다섯 칸인 사랑채가 보인다. 원래 사랑채는 지을 당시에는 억새를 엮어 만든 초가집이었지만, 1971년 봄 평기와집으로 고쳤다고 한다. 지금은 1971년 고친 모습 그대로다. 오른쪽부터 큰 사랑방, 작은 사랑방, 안마루, 중문간, 중 사랑방이 있다. 수 년 전만 해도 광주안씨 11대손인 고 안봉환 씨가 숨지기 직전까지 실제로 생활했던 곳이다.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 앞에는 '예강서원(禮岡書院)'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예강(禮岡)'은 김해의 지식인으로 강우학맥을 주도한 유학자 예강 안언호의 호다. 안언호는 1853년 시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온화하고 학문을 닦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6세에 <효경>을 읽었고, 13세에 금곡리의 '용봉제'를 오가며 대눌 노상익, 소눌 노상직 등과 교제했다고 한다. 그는 성재 허전의 제자이기도 했다. 허전은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해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성했고, 이후 정약용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가는 선비였다.
 
안언호는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를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벼슬에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스승인 허전에게 "과거 공부는 마음을 수양하는 데 해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29세에 아버지와 함께 한성시에 응시했다. 이때 자신의 답지를 부친의 이름으로 냈다고 한다. 이 답지는 '제일'로 뽑혀 회시에 응시하게 됐고, 33세에 회시에 합격해 아버지에게 관직을 안겨줬다고 한다. 광주안씨 39대손으로 안언호의 증손자인 안무환(75) 씨는 "과거에는 관직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 때문에 예강 할아버지를 효자라고 칭송했다"고 설명했다.
 
안언호는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쓴 <예강집>에는 관직을 보는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대개 사람이 배우면 커서는 실행하고 싶어한다. 집안에서 실행하는 것이 나라에서 실행하는 것만 하겠는가. 나라에서 실행하려고 한다면, 조정에서 임금께 신명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간혹 과거공부를 해서 과장에 출입하기를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이제 내 나이가 이미 40여 세. 필경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 있을까? 세도가 다시 옛 같지 않고, 진취할 때도 아닌 터이니. 결국 미련 없이 돌아와 옛 글들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길러 늘그막의 계획이라도 이루고자 한다.'
 

▲ 염수당에 있는 전통 방식의 가묘 입구.

안언호는 시례리에 있던 홍립재를 중수해 학생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고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침탈로 사회 체제와 질서가 붕괴되던 시기에 전통적 가치관과 효우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43년 8월 14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안씨 가문과 김해의 유림들은 매년 음력 3월 그를 기리는 '예강재채례'를 지내고 있다.
 
염수당에는 염수당만큼이나 귀중한 보물도 있다. 염수당보다 15년 앞서 경남도문화재자료 제279호로 지정된 <염수당 고문서>다. 12책 6매 즉 18점으로 이뤄진 고문서에는 안언호가 허전, 눌재 김병린, 회봉 하겸진, 심제 조긍섭, 노상직 등 당대 명사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양반사회에서 오고 간 혼서, 분재기 등이 있다. 고 안봉환 씨가 세상을 떠난 뒤, 고문서는 아들인 안대휘 씨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안무환 씨는 "분재기에는 250년 전 유산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내용이 담겨 있다. '논 몇 마지기는 큰 아들, 몇 마지기는 작은 아들'부터 시작해서 숟가락 하나까지도 세세하게 적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은 유산 때문에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가족 간의 분쟁을 없애기 위해 쓴 글이다. 오늘날의 유산 상속 방법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염수당 안쪽에는 전통 방식을 따라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가묘가 있다. 고 안봉환 씨는 매일 아침 몸을 정결하게 하고 향불을 켰다고 한다. 안대휘 씨 역시 염수당에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가묘다. 조상들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돌아나오려는데 염수당에서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사랑채 앞에 무릎보다 낮은 높이에 있는 굴뚝이다. 보통 굴뚝은 지붕 위에 있지만 염수당의 굴뚝은 땅 바로 위에 세워져 있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가난한 이웃들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 봐 굴뚝을 낮게 지었다고 한다.
 
광주안씨 39대손이자 마을 이장인 안병숙(57) 씨는 "주위에 못 먹는 사람들이 힘들어할까 봐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 낮은 마음으로 배려하며 살아가라는 선조의 뜻을 담고 있다. 80여 가구로 이뤄졌던 집성촌에 이제 남은 가구라고는 30여 채에 불과하지만 선조들의 전통과 정신을 잘 이어나가는 상촌마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염수당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진례로311번길 95-12(시례리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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