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조공들의 행진.1897. 동판>1893~1898년 사이 제작한 6점의 연작 판화 중 하나. 궁핍과 죽음 음모와 행진 그리고 폭동과 결말로이름 붙은 각각의 작품들은 실패로 끝난 비극적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무력에 의해 정권을 빼앗는 일이 쿠데타다. 서울에서 훈장을 나눠단 장군들이 옷을 갈아입고 번갈아 대통령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인사동의 한 화랑으로 놀러 갔다.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첫 세대인 오윤 등의 민족미학을 지나온 후, 촛불 속에서 치른 '현실과 발언' 동인전도 있었다. 놀러간 곳은 바자회였다. '노동인권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한 행사였다. 부천 경찰서에서 입에 담기 힘든 일을 겪은 권인숙 씨가 중심이 된 행사에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기증했고 구매자도 많았다. 성황이었다. 전시작품은 다양했지만, 당시 민중미술의 꽃이었던 목판화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프로파간다 즉 선전으로서의 미술이 여전히 유효한 시대였고 흑백의 목판화는 그 강렬함으로 여전히 효과적이며 효율적 장르였다. 나도 이철수 목판화 3점을 골랐다. 씨는 아직 무명이었고 다른 이들과는 달리 호소력보다는 서정성이 짙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체'하지 않는 좋은 덕목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우리 민중미술에서 차지하는 목판화의 계보를 잘은 모르지만 1930년대 루쉰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목판화운동으로부터 우리의 80년대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루쉰으로 하여금 판화선집을 내게 만든 콜비츠의 영향 또한 무시 할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화단에는 홀로 우뚝 섰던 판화가 케테 콜비츠가 있었다. 그리고 케테 콜비츠 미술관.
 
▲ 케테 콜비츠 미술관 내부.

라인 강변의 오래 된 도시 쾰른의 영어 이름은 콜론이다. 식민지라는 어원이 이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카이사르가 라인강을 건너 함락시킨 게르마니아 도시 중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로마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도시다. 오늘날은 인구 백만의 거대 도시. 쾰른 대성당 앞길은 전 지구적 관광객이 뒤엉켜 장날 회현동 5일 장터처럼 붐빈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갖가지 온갖 유혹의 물품들로 무장된 상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다. 호헤 거리를 따라 걷다가 사람들이 움직이는 오른쪽으로 함께 길을 바꾼다. 다시 십여 분. 인파 속을 걷는데, 문득 주위가 조용해 진다. 어느새 관광지를 벗어났다. 이제 쾰른 시민들의 일상의 거리다. 그곳에 있다. 그곳의 한적한 쇼핑 아케이드 꼭대기 층에 케테 콜비츠 미술관이 자리잡고 있다. 1층에 손님이 드문드문 드는 서점과 여럿의 상점들과 약간은 나른해 보이는 카페테리아가 있는 곳.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조금은 초현실적인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건물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 내부 또한 한적하다. 이제 이런 종류의 미술 따위엔 아무도 관심 없다는 것일까.
 
인상파 이은 표현주의 미술 흐름 아랑곳, 배고프고 억압받는 사람들 모습 작품화로
사회적 관심 회복에 진력한 시대의 예술가, 루쉰 중심 중국 목판화 운동에도 큰 자극

▲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1919~1920. 목판>케테 콜비츠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보급된 작품.

케테 콜비츠가 미술 작업을 시작하던 시기는 인상파의 물결이 유럽 대륙을 휘몰아친 뒤, 객관적 사실보다는 오히려 왜곡이나 과장을 통해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려는 표현주의라 부르는 새로운 유파가 독일과 북유럽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하지만 케테 콜비츠는 미술판을 지배하는 시대적 흐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배고프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사회적 관심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미술이 온전한 삶이었던 그녀의 태도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의 외연을 가식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그러한 삶은 가족들의 영향이 큰 몫을 했다. 목사였던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복음주의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합리주의와 윤리를 강조하는 자유신앙운동가였으며, 그녀 아버지는 세속적 출세의 보장인 법관을 그만두고 미장이의 길을 택한 유별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또한 의사로서 돈을 버는 길을 버리고 노동자들을 위한 조합의사 일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다. 한편 끊임없이 죽음을 응시하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는 1차대전과 2차대전에 각각 페터라는 같은 이름을 쓰는 둘째 아들과 손자를 전사로 잃은 고통의 산물이기도 했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자 먼저 온 관람객 몇몇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점 한 점의 그림들을 마치 가슴에 새기듯 감상하고 있다. 허락은 받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마다 셔터소리가 미술관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다. 일단 사진과 연보 등 자료 전시가 끝나고, 본 전시는 1893년에서 1898년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한 6점의 연작 판화 '직조공들의 봉기'로 시작된다. '궁핍'과 '죽음', '음모'와 '행진', 그리고 '폭동'과 '결말'로 이름 붙은 각각의 작품들은 실패로 끝난 비극적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특히 '직조공들의 행진'(1897년, 동판)에서 잠든 아이를 업고 땅을 보며 묵묵히 행진을 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1903. 동판.

반가운 작품도 만났다. 프리모 레비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의 표지에서 보았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동판)가 미술관 한쪽 벽에 걸려 있다.
 
그녀의 목판화 중 가장 많이 보급되었다는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1919~1920·목판)를 보면서는 우리 세대가 겪어야 했던 70년대와 80년대 생각이 문득 떠오르고, '전쟁' 연작 판화 중 '부모'(1923·목판)를 보면서는 목판화만의 강렬한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중 '희생'(1922~1923·목판)은 중국 목판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작품이다. '북두'라는 잡지에 실려 1931년 중국에 최초로 소개된 케테 콜비츠는 루쉰을 포함한 중국의 지식인층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는 중국의 목판화 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 <희생. 1992~1923. 목판> 루쉰을 비롯한 중국 지식인층에 영향을 끼쳐 중국 목판화 운동에 큰 자극이 된 작품.
미술이 혹은 예술이 신념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논쟁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참여니 순수니 하는 논쟁이 이데올로기와 결부되면서 본질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이젠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시들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예술이라는 것이 문학이든 미술이든 양식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모든 예술이 신념에 복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유행과 빠르게 바뀌는 세속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의 신념을 향해 묵묵히 칼을 들어 역사에 새긴 케테 콜비츠야 말로 가장 예술가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전시장 초입에 있는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이 베를린에서 금상에 선정되자 책임 내각은 "작품의 주제와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하거나 달래 주는 요소가 전혀 없는 그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유로" 황제에게 선정을 수락하지 말 것을 권했다. 서양미술사를 쓴 곰브리치의 말대로 바로 그러한 것이 케테 콜비츠가 자신의 작품에서 의도했던 바였다.
 
"나의 작품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 구제 받을 길 없는 사람들,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진정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을 위해 한 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담당하려 한다."


■ Tip 독일을 대표하는 연작 시리즈 남긴 여류 판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독일의 화가/판화가이며 조각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림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유화를 그리다가 뒤에 에칭·석판화·목판화 등을 제작하였다. '직조공들' 이라는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된 연극을 보고 당시 독일의 비참한 노동현실을 인식. 이후 가난한 노동자들의 참상을 표현한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 판화를 제작하였다. 이후 두번째 시리즈 작품인 '농민전쟁'(1902-1908)을 제작하였으며 자신의 둘째 아들이 1차대전에 동원되어 전사하자 세번째 시리즈 작품인 '전쟁'(1922∼1923)을 제작하였다. 그녀의 테마의 연작 시리즈는 독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케테 콜비츠는 부당한 권력에 투쟁하는 예술가로 표상된다. 1919년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지만 히틀러가 집권하자 그녀의 모든 것이 박탈당하였고 1936년이 되자 작품 전시도 금지되었다. 2차대전 중 그녀의 집은 폭격을 받아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1945년 4월 22일 연합군에 의해 독일이 해방되기 전 사망하였다.
 
*케테 콜비츠 미술관

쾰른의 한 은행의 기금으로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하여 그녀의 사후 40주년이 되던 1985년 개장하였다. 1989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자리 잡았다.
 
현재 130점이 넘는 드로잉과 15점의 조각과 150점에 달하는 포스터와 판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베를린에도 같은 이름의 미술관이 있지만 대부분의 주요 작품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주요 전시 작품으로는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 판화, '농민 전쟁' 연작 판화, '전쟁' '프롤레타리아' 등으로 대표되는 목판화 작품 시기, 그리고 '죽음'으로 대표되는 말기의 석판화 등과 이와 더불어 유명한 포스터 작품들도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 케테 콜비츠 미술관이 있는 쇼핑 아케이드.

주소 Neumarkt 18-24 Koln | 전화 227 2363  | 개관시간 10:00-18:00 (월요일 휴관)
입장요금 5유로 | http://www.kollwitz.de/en/default.aspx





윤봉한 김해 윤봉한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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