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을 지극히 사랑했던 임금이 바로 영조다.

영조 49년,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80세의 영조는 '내가 병술년(1766년·영조 42년) 이후로 복용한 인삼이 100근(60㎏)이나 된다'고 했다. 7년간 하루에 건조된 인삼 한두 뿌리씩을 먹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인삼을 재배했던 시절이 아니라서 소위 자연산 산삼을 그렇게 먹었다는 것이니깐 실로 인삼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던 셈이다.

또한, 영조는 고추장 예찬론자였다. 영조는 즉위 24년(1748년) 심한 현기증과 입안 염증으로 밥을 먹지 못해 기력이 고갈돼 사경을 헤맸다. 그 때 간신히 밥맛을 살린 것은 아들 사도세자가 구해온 고추장이었다. 그는 '내가 천초(川椒) 같은 매운 것과 고추장(苦椒醬)을 좋아하게 됐다. 이것도 소화 기능이 약해져서 그런가?'라고 했다. 영조는 기본적으로 소식을 했다. 또 면을 즐기지 않았다. 특히 냉면을 먹고는 '천하에 못쓸 음식이다'라고까지 했다. 차고 설익은 음식에 부정적이었고, 타락죽을 자주 먹었다.

이러한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영조는 소화기가 차고 약해서 열성의 음식은 물론 약물이 좋고 차가운 성질의 음식은 맞지 않았던 체질로 짐작된다. 그는 자신의 몸에 나쁜 것들은 피하고, 체질에 맞는 음식과 약재들을 꼼꼼하게 챙기면서 건강과 장수를 유지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적합한 식습관이 오히려 그의 후손들에게는 악영향을 미치는 비극의 원인이 됐다.
영조의 마르고 깐깐한 모습과 반대로 아들 사도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머리가 크고 몸집이 우람했다. 식성도 유달리 좋아서 어린 세자가 먹는 양이 어른과 비슷할 정도였다. 그래서 인지 세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이미 키가 어른만 했다. 배는 어른보다 더 나왔다. 아홉 살 때 팔뚝의 굵기가 영조보다 두꺼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스무 살에 둘렀던 허리띠가 아홉 살 세자의 허리에는 작았다.


 

사도세자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뻘뻘 흘렸다. 가만 있지를 못하고 놀기를 좋아했고, 음식을 보면 가리지를 않았다. 그야말로 아버지 영조와는 반대체질이었던 듯하다. 뚱뚱하고 땀이 많으며 성질이 급한 사도세자의 소화기는 차게 해줘야 건강할 터였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의 영향인 듯 열성 음식과 약물을 많이 섭취해  과도했던 속열을 더욱 뜨겁게 만든 것 같다. 사도세자는 긁어서 피가 나고 딱지가 생길 정도의 습진과 가려움에 시달렸다. 지독한 항문 가려움증으로 고통스러워했다. 몸만 가려운 것이 아니라 광증까지 생겨서 나인과 내시를 죽였다. 심지어 자신의 자식을 낳은 후궁까지 때려 죽였다. 스스로도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

사도세자가 낳은 첫째 아들이 의손세자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태열 때문에 온몸에 진물이 흐르고 설사를 계속 하며 잔병이 끊이지 않았다. 의관들이 찬성질의 약을 써야 한다고 주장할 때 영조는 "엉뚱한 소리하지 마라. 지금 세손의 기운이 이리도 약해졌는데 그렇게 찬 약들은 쓸 수 없다"라고 호통을 쳤다. 결국 치료방향을 정확히 정하지 못한 체 의손세자는 태어나서 2년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만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다음 왕이 된 정조 역시 더위를 많이 타고 울화가 많은 체질이었다. 다행일까? 정조는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책을 즐겨 읽었다. <동의보감>을 자신의 관점으로 다시 편집해 <수민묘전>이라는 의서를 직접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술과 담배를 즐기기로 유명한 정조이지만 자신이 속열이 많은 체질이라는 판단을 하고 '나의 병은 한여름에도 반드시 땀이 나야 속열이 빠짐으로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관들이 내린 처방들도 일일이 점검해 인삼과 같은 열이 많은 약재들은 철저하게 삼가면서 건강관리를 했다.

자신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타인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유행에 따르는 식품 및 약물의 무분별한 남용을 경계하고 자신의 체질에 맞는 건강법을 알고 실천해야겠다.

조병제 한의학·식품영양학 박사 부산 체담한방병원장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