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대서 '강제동원-그날의 기억' 전시회 진행
미공개 유물, 자료 통해 역사 전체 흐름 보여줘
인도네시아 끌려간 부친 흔적 찾아온 70대 증언



"XXX들아!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조선인 강제동원을 다룬 영화 '군함도'의 끝 부분에서 어린 소년이 이렇게 부르짖는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지옥의 섬이라고 불릴 만큼 끔찍한 군함도(하시마)에 끌려온 것일까.

이 소년처럼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게 강제동원 됐던 피해자는 일본의 통계자료를 따르더라도 782만 명이 넘는다. 여기에 서류상으로 남아있지 않은 강제동원까지 포함된다면 그 숫자는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그 엄청난 역사는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로 머물러 있다.

▲ '강제동원 전시회' 개막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측으로부터 전시회 설명을 듣고 있다.

이런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기억하기 위한 전시회 '강제동원 공유하기-그날의 기억'이 김해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지난 8일 인제대 김학수기념박물관에서 개막식을 열고 전시회를 시작했다.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이후 9월 1일~10월 31일까지는 인제대 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겨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소장 유물과 기증을 통해 새로 수집한 유물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전시는 강제동원의 전체 흐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6가지 주제로 나뉘어 이뤄졌다. 박물관 밖은 여느 대학교 캠퍼스와 다름이 없었지만, 박물관 안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김학수기념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제1주제인 '일본제국주의 팽창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전시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강제동원이 일어난 배경인 일본제국주의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함께 전시돼 있는 일본군·일본인 들의 사진·그림에는 일본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제2주제부터는 본격적인 한반도 수탈을 다룬다. 일본은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 공포,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 1943년 조선인징병제 공포,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 공포, 1944년 학도근로령 공포 등 관련 법령을 제정하면서 치밀하게 한반도 수탈을 진행했다. 김정원 학예연구사는 "제국주의 정책을 이어가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의 수탈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공출은 물자 공출과 인적 공출로 나뉜다. 일제는 강점기 초기부터 일본의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 했기에 우리나라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당했다. 이런 피해는 중일전쟁 전후 물자 공출 제도로 번지며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일정 식량 생산을 책임져야 하는 강요로 이어졌다고 한다. 인적 공출은 강제동원이다. 공출이라는 단어는 원래 물자에 한정해 사용한다. 그러나 일제는 사람에게도 거리낌 없이 이 단어를 사용했다. 결국 일제에게 조선인은 필요에 따라 사용해도 되는 물자였던 셈이다.

전시된 사진 속에서 일제에 공출해야 하는 쌀가마니라도 이고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행복한 셈이었다. 배를 곯아 내놓을 쌀도 없는 사람들은 결국 인적 공물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창고가 바닥 난 집안 곳곳을 뒤지고 뒤져도 빈털터리인 신세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공출해야 했을 아낙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게 강제동원된 수가 조선총독부통계연보 기록만 해도 782만 7355명이다.

제3·4주제는 이들이 어떻게 강제동원됐는지 그 유형과 지역을 설명한다. 강제동원 피해자 중 노무동원은 755만 명, 군무원 동원은 6만 3천 명, 군인 동원은 20만 명이다. 군함도, 사할린 등 한반도 밖으로 노무동원된 사람만 100만 명에 이른다. 동원된 사람은 젊고 건장한 청년에 그치지 않는다. 소녀, 소년, 아낙들도 포함됐다. 전시된 사진 속 아낙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손에는 제 키 반만한 삽을 쥐고 있다. 강제동원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전쟁 성노예)'도 포함돼 있다.

전시대 안에는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이 기증한 물품들도 있다. 70여 년 전 군인으로 강제동원 됐을 당시 착용했던 각반, 계급장, 일본의 지침에 따라 가슴에 매고 갔던 일장기에도 과거의 아픔이 묻어 있었다. 특히 일장기에는 한자로 '몸 건강히 돌아오라'는 뜻을 담은 문구들이 가득했다. 이외에도 손때가 묻은 숟가락, 칫솔 통, 군용수통 등이 전시됐다.

제5주제 '끝나지 않은 강제동원'에서는 해방 이후 돌아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삶과 이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 등이 다뤄졌다. 강제로 징집됐던 조선인들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범이 되기도 했다. 일본은 가혹행위의 책임을 포로감시원에게 전가했고, 연합군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지 못해 조선인을 전쟁범죄자로 지목해 사형을 시키는 안타까운 일도 일어났다.

▲ 한 어르신이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에서 옛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부산에서 전시회를 찾은 조만성(78) 씨는 전범이 된 조선인들을 다룬 전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부친이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강제동원됐던 것이다. 조 씨는 "아버지 형제가 3명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무조건 전쟁에 가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인도네시아에 갔다고 한다. 공중에서 폭격이 쏟아질 때 철도 공사를 하는 등 죽을 고비를 수없이 지났다고 들었다"며 부친의 증언을 회상했다.

부친이 인도네시아에 강제동원 됐을 당시 조 씨의 나이는 3세 남짓이었다. 2년 계약을 하고 인도네시아로 갔지만 그의 부친은 해방 때까지 3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 마지막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로들과 함께 탈출을 하려다 잡히기도 했다. 그의 부친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가 일본이 항복한 덕분에 기적적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됐다고 한다.

조 씨는 "9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 때의 기억이 너무 괴로운지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 했다. 이곳에서 전범으로 몰렸던 피해자들의 기록 등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왔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과거의 억울함이 많이 드러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6주제에서는 '우리만화연대' 소속 작가들이 그린 군인·군무원·노무자·여성동원 관련 만화작품과 우토로 마을 사진들이 걸렸다. 시사만화의 대부인 박재동 작가의 '끝나지 않은 길'은 고향을 등지고 머나먼 길을 떠나 온 우리나라 소녀의 모습을 그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이끌려 가는 길 속에 돌아가는 길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소녀의 막막함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최근 '무한도전'에서 방영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우토로 마을의 최근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강제동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우토로 마을의 철거를 앞두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남기기 위해 지난해 겨울 촬영한 모습이었다.

사라지는 우토로 마을처럼 강제동원의 산 증인인 남은 생존자들 역시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나가는 현재의 삶 속에 너무나 중요한 역사가 지나가 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전시관 가운데 쓰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한마디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강제동원 피해의 마침표는 일본의 진실된 사과와 보상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의 기억이다. 이번 전시의 이름이 '강제동원 공유하기- 그날의 기억'인 것도 같은 이유다. 이번 전시를 진행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김용봉 이사장의 인사말이 이를 잘 담고 있다.

"70년이 지났지만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돌이켜 기억하고, 깊이 인식하고, 후세에 교육함으로써 인권 유린이라는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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