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춘몽 성진의 꿈처럼
낮잠 한 번 잘 자고
일어나면 다른 내가 되었으면…


유달리 늦었던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는지, 지나던 중이었는지 모르겠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읍내로 공부하러 나왔을 때 나는 꿈에 부푼 소녀가 아니었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계획에 따라 실천해 나가기에 너무나 아득한 시간 앞에서 다만 어쩔 줄 몰랐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난다는 것,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사소하고 별다른 의미도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도 내가 그것들을 느낀다는 것…. 까닭 없이 기뻤다가 또 그렇게 슬퍼지곤 하던 때. 나는 자주 비현실적인 것을 꿈꾸었다.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과 함께 나를 둘러싼 어둠 같은 아득함이 꿈이었으면 하고.
 
'구운몽'은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이 여덟 선녀와 잠깐 말장난을 한 죄를 받아, 지상의 양처사의 집 아들 양소유로 다시 태어나 여덟 선녀와 연분을 맺어 살다가 문득 깨어 보니 꿈이었다는 이야기다. 지상의 모든 인연은 전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이 살짝 비치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유교적 도덕관에 입각해 있고, 수십 년 삶의 행적이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모두 꿈이었다는 도교의 냄새도 난다. 당대의 지배윤리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발상이다.
 
숙종의 첫 번째 비(婢) 인경왕후의 숙부가 되는 김만중은 당대 명문거족 광산 김씨 가문 사람이었다.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忠)을 첫 번째 덕목으로 삼았던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청병의 손에 함락되자 김상용 등과 함께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했다.
 
그때 김만중은 어머니 윤씨 부인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퇴각하는 병사들을 태운 배(船)를 얻어 타고 강화도를 빠져나가던 중, 윤씨 부인은 배 위에서 김만중을 낳았다.
 
엄청난 출생의 충격과 함께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서인의 주요 인물로 활약했으리만큼, 생애 또한 순탄하지 못했다. 더구나 전쟁의 와중에서 남편을 잃고, 엄격한 사대부 가문의 관습과 도덕률에 따라 청년과부로 수절하면서 두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를 바라볼 때마다 아들 된 도리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쳤으리라.
 
참혹하고 아픈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소설의 여러 기능 중 하나다. 뜨거운 현실에서 잠시나마 비껴서서 객관적 거리를 가져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을 '구운몽'에서 얻었다.
 
'구운몽'보다 먼저 장자를 읽었다면 인생지사 일장춘몽(人生之事 一場春夢) 해탈의 경지에 가 보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이 아득하여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아득한 현실을 아득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도 자주 나는 꿈꾼다. 아득하여,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생을 뒤집어버리고 싶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싶다. 낮잠 한 번 잘 자고 일어나면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었으면 싶다.


>>조명숙은
1958년 김해 생.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창작집 '헬로우 할로윈', '나의 얄미운 발렌타인'과 장편소설 '바보 이랑', '농담이 사는 집' 등 발표. MBC창작동화대상, 부산작가상, 부산소설문학상 등 수상. 현재 김해 도요마을에서 집필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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