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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보다 높이 선 왕비릉… 허왕후 강한 세력 입증하는 증거물(12)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 수정 2017.08.16 10:05
  • 게재 2017.08.16 10:01
  • 호수 335
  • 13면
  • 조나리 기자(nari@gimhaenews.co.kr)
   
▲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수로왕비릉. 조선시대인 1446년 재정비됐다.


조선시대 1446년 두 능 함께 정비돼
비에는 ‘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 문구

도 문화재 자료 227호 파사석탑 존재 눈길
원래 호계사 있다 폐사 뒤 곳곳 흩어져
1873년 부사 정현석 한곳에 모아 정비



김해의 '할머니'인 허왕후의 무덤, 국가 사적 제74호인 수로왕비릉은 구산동 구지터널 바로 옆에 있다. 특이한 점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가까이 두는 일반적인 사례와 달리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은 직선으로 약 1㎞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왕비릉이 수로왕릉보다 높은 지대에 있다는 점 역시 특이하다. 실제로 수로왕비릉에서는 수로왕릉을 포함한 봉황동유적지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 수로왕비릉 정문인 구남문.

그 이유를 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고향인 인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높은 곳에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행복을 기원하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일부에서는 이곳이 원래는 수로왕릉이 들어설 자리였다고 한다. 이곳은 햇볕이 잘 들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자리여서 왕릉으로 점찍어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허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수로왕이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최고의 명당을 양보해 왕비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느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로왕비릉이 홀로 세워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허왕후의 세력이 강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로왕비릉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면 푸른 산과 소나무를 배경으로 세워진 늠름한 능이 보인다. 무덤의 지름은 약 16m, 높이는 약 5m여서 수로왕릉의 크기와 비슷하다. 이 역시 허왕후가 강력한 세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수로왕비릉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주변의 모습은 조금 바뀌었다. 조선시대인 1446년 수로왕비릉은 수로왕릉과 함께 정비됐다. 1647년에는 능비와 상석이 설치됐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보주(普州)'라는 단어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보주'가 '넓은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중국 사천성 안악현의 옛 이름인 '보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를 근거로 허왕후가 인도 아요디아에서 곧바로 온 게 아니라 사천성 안악현 보주로 이주한 뒤 가야로 왔다는 주장도 있다.

   
▲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파사석탑.

수로왕비릉에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도문화재자료 제227호인 파사석탑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허왕후는 인도에서 가락국으로 올 때 파도가 너무 거세서 항해를 할 수 없게 되자 배를 돌려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부친이 파도를 진정시켜 준다는 파사석탑을 가져가라고 해 배에 싣자 무사히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파사석탑은 5층으로 돼 있고, 높이는 120㎝ 정도다. 파사석탑은 수로왕비릉을 마주보고 섰을 때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파사석탑은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고, 두 차례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처음에는 가야 제8대왕인 질지왕이 동상동에 호계사(현 연화사)라는 절을 세운 뒤 그곳에 파사석탑을 뒀다고 한다. 오랜 역사의 풍파 속에 절이 폐사되는 바람에 파사석탑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1873년 김해부사 정현석이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왕후능 곁에 두어야 한다'고 해 수로왕비릉으로 옮겼다고 한다. 처음에는 능을 따라 쌓은 석축 안에 파사석탑이 있었지만, 파사석탑이 문화재로 인정받은 뒤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에는 석탑 주변에 보호각도 세웠다.

파사석탑이 그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조은금강병원 허명철 이사장의 공이 컸다. 재야사학자인 허 이사장은 "당시 한 신문사 기자가 '허왕후 무덤에 돌덩이 다섯 개를 쌓아놓고 탑이라고 주장한다'고 (폄훼하듯이)말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파사석탑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파사석탑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약 30년 전부터 파사석탑을 연구하고 실험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돌이 아니라고 했던 일연스님의 기록과 중국 명나라의 <본초강목>에 나온 기록을 따라갔다. <본초강목>에는 '파사석에는 해독작용이 있다. 파사석과 유사한 돌이 많다. 파사석을 태우면 유황 냄새가 나며, 닭벼슬 피를 묻히면 응고되지 않고 물처럼 돼 흘러내린다'고 돼 있다.

허 이사장은 1987년 파사석탑 주변에 풍화작용으로 떨어진 작은 파편을 주워 실험했다. 그는 이를 가루로 만들어 불에 가열했다. 그랬더니 <본초강목>처럼 심하게 유황 냄새가 났다고 한다. 가루로 만든 파사석과 일반석에 닭벼슬 피를 각각 섞자 파사석에는 피가 마르지 않고 남아 있는 반면 일반석은 피가 말라버렸다고 한다.

   
▲ 인도 하원의장 일행이 우리나라 전통의상을 입고 왕비릉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허 이사장은 파사석탑의 형체도 분석했다. 파사석탑은 현재 삼각형 모양으로 놓여 있지만, 원래는 인도의 스투파처럼 네모난 돌이 역삼각형 형태로 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석탑 위에서부터 2~3번째 돌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이 돌 두 개의 자리를 바꾸면 구멍이 구와 같은 모양을 이룬다고 한다. 허 이사장은 "파사석탑은 네모반듯한 모양이었지만 파사석의 영험한 기운을 알았던 사람들이 이를 조금씩 떼어가는 바람에 지금처럼 뭉툭한 모양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수로왕비릉에는 허왕후가 가져온 파사석탑 외에도 허왕후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바로 '다전마을'이라는 이름이다. 허왕후는 수천 년 전 인도에서 봉차 씨앗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때 가져온 차를 주로 수로왕비릉 인근에서 재배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일부 터만 남아 있지만, 왕비릉 근처 동상동·구산동 일대는 과거 '다전마을'이라고 불리며 차밭이 크게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차를 잘 마시려면 좋은 물이 필수적이다. 수로왕비릉 인근에는 좋은 지하수가 내려온다고 한다. 지금도 물통을 들고 가서 수로왕비릉에서 물을 떠가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역사와 관계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2017년 8월 현재 수로왕비릉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는 최춘원 씨가 중국 출신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결혼이주여성으로 알려진 허왕후의 삶과 능을 소개하는 일을 다문화 이주여성이 맡았다니 참 묘한 인연이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수로왕비릉 / 가락로 190번길 1(구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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