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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온 동네에 살구나무 꽃피고, 겨울이면 못에서 스케이트 타고 놀고(8) 지내동 못안마을
  • 수정 2017.08.23 10:52
  • 게재 2017.08.23 09:39
  • 호수 336
  • 12면
  • 배미진 기자(bmj@gimhaenews.co.kr)
   
▲ 물봉산 아래 위치한 못안마을 전경(위). 못이 있던 자리에는 주유소가 들어섰다.



물봉산·평락골 발원한 못에서 이름 유래
‘못에 달빛 비쳐야 부락 편안하다' 생각

박해수 씨 개발 덕분에 하우스재배 시작
3월엔 서울 상인들 토마토 챙기느라 북적

산업화 물결 탓 전답 28만㎡ 공업지 전락
소득 향상 도움됐지만 마을은 되려 낙후




"이번 정류장은 지내동 입구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못안마을입니다."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김해로 들어오면 불암동을 거쳐 못안마을 정류장을 지나간다. 주변에 보이는 건물이라곤 빽빽한 아파트 단지와 공장뿐인데 마을이라고 안내하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못안마을은 지내동의 옛 이름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마을 한가운데 못이 있어 못안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못은 마을 동쪽에 위치한 물봉산과 서쪽 평락골 골짜기에서 발원된 맑은 물이다. 가락국 초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이름을 따라 1947년 6월부터 '못 지(池)', '안 내(內)'를 써서 지내동이 됐다.

"옛 어른들은 못에 달빛이 비쳐야 부락이 편안하다고 했지. 사실 못안마을이라는 명칭은 김해뿐 아니라 부산, 진주, 울산에도 있어. 천수답인 지역은 못을 파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지." 못안경로당 고문 김찬식(86) 씨가 설명했다.

   
▲ 못안경로당 옆에 위치한 못안마을 표지석.

마을에는 두 개의 못이 있었다. 보릿고개 시절 김해읍에서 '강약국'을 운영하던 못안마을 출신의 강순중 씨는 극심한 가뭄피해를 걱정했다. 당시에는 마을주민 모두 농사를 지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들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1961년 강 씨는 자비로 땅을 사서 원래 있던 못 바로 아래에 수심이 깊은 못을 팠다. 물 걱정을 해소한 주민들의 반응은 마을 유래비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덕분에 가을철에는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해 농부의 환한 얼굴은 일망무제(一望無際) 보름달과 같았다.'

"위쪽 못은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였지. 겨울이 되면 꽁꽁 언 못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고 옷이 젖으면 어머니에게 혼날까 봐 불을 피워 말리기도 했다. 여름이면 수심이 낮은 곳에서 목욕도 하고 고기를 잡았어. 둑에는 두 그루의 큰 당산목이 있었는데 성인 4~5명이 안아야 할 정도로 굉장히 큰 아름드리 나무였지. 지금은 죽고 없지만 말이야." 못안마을 노인회 김병찬(79) 회장이 옛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살구나무도 유명했어. 집집마다 살구나무가 두 그루 이상 있었지. 봄이 되면 초가집에 살구나무 꽃이 피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어. 마을 앞에는 14번 국도가 지나갔는데 서부경남사람들이 부산을 가다가 못안마을의 풍경을 보곤 감탄했어."

마을에는 김해김씨, 진주강씨, 창녕조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16대째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김찬식 씨는 "김해김씨가 이곳에서 400년 넘게 살았으니 마을 역사는 400~500년 정도 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을 대부분은 넓은 들판이라 농작물 재배가 활발했다.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도 퇴근 후에는 농사를 지었다. 먹을 게 없던 시절 쌀이 매우 귀했기 때문이었다.

불암3통장 김찬호(54) 씨는 못안마을이 비닐하우스 농사의 1번가였다며 자랑했다. 김 통장은 "김해 출신의 박해수 씨가 비닐을 이용한 농업을 개발한 후 널리 보급해 마을 주민들이 비닐하우스 재배를 시작했다. 봄이 되면 비닐하우스를 걷어내고 벼농사를 지었다"고 말했다.
 

   
▲ 못안마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이 못안경로당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나무 틀로 뼈대를 만든 후 비닐을 씌운 하우스에서는 토마토와 오이, 쑥갓, 상추 등을 심었다. 특히 토마토를 많이 재배했는데, 3월 말 수확철에는 서울에서 상인들이 내려올 정도였다. 겨울철 온 들판을 하얗게 만든 비닐하우스는 부농으로 가는 밑거름이 됐다. 농민들은 지게와 소달구지를 이용해 경작하다가 1964년 경지정리가 되며 기계화 영농을 시작했다. 김 통장은 "지금은 밀양 깻잎이 유명하지만 그땐 밀양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배우러 왔다. 재배하는 법부터 깻잎 따는 법까지 공부해갔다"며 환하게 웃었다.

어스름한 등잔불로 생활하던 시절, 마을을 밝혀주는 전기는 1968년에 공급됐다. 곧장 새마을운동의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지역사회 개발움직임인 새마을운동은 마을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길을 포장하고 지붕과 담장을 개량하며 전원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은 마을 일대를 송두리째 바꿔 놨다. 공업용지와 주거지를 해소하기 위해 마을 앞 28만 3000㎡의 전답이 지내준공업지로 지정된 것이다. 1992년 5월 착공해 1999년 12월 완공되면서 위·아래 못과 옥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 어르신은 "계획적이지 않고 무분별한 개발이었다. 공장과 주택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서며 엉망이 됐다. 지내동이 김해에서 가장 빨리 발전한 곳이었지만 거꾸로 지금은 많이 낙후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통장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중소부품공장이 많이 들어서 지역주민들에게는 일정부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옛 마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어르신들은 못안경로당에 모여 추억여행을 떠났다. 그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은 후 당부도 잊지 않았다.

"마을의 역사를 다룬 자료가 많지 않아 사람들이 잘 몰라. 물봉산 정기는 오늘도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다네. 지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못안마을이 오래오래 기억됐으면 좋겠어."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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