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까지 감로사가 존재했던 상동면 감로리 신곡마을의 옛 절터. 지금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각종 고서에 존재감 있는 절로 기록돼
원감국사 등 중량감 있는 스님 거쳐가

조선 말 폐사 이후 이젠 흔적도 없어
석탑 부재, 승탑 등 동아대박물관 이전

상동면 차 군락지 인근 절터 위치 들어
“가야시대에 이미 사찰 있었다” 주장도




'일엽편주 거울 같은 물에 날아오니/ 공중에 빛나는 금벽은 절이로구나/ 고갯 머리 푸르름은 산 그림자 아니요/ 돌 위에 졸졸거리는 물 빗소리 같구나/ 포근한 햇살에 뜰의 꽃은 얇은 푸르름 감추고/ 서늘한 밤 산 달빛은 희미한 빛을 보낸다/ 백성을 염려해도 도탄에서 건져내지 못하니/ 부들 자리에 앉아 여생을 보내려 한다(안견)'

▲ 낙동강 건너 물금 용화사로 옮겨진 보물 491호 석조여래좌상.

낙동강에 접한 상동면 감로리 신곡마을 444-1번지에는 감로사(甘露寺)가 있었다. 감로사는 과거 김해지역 사찰 중에서 규모나 인지도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큰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문인 안유와 이견간이 감로사를 읊은 시가 전할 정도다.

감로사는 고려 충렬왕 때 송광사의 주지로 유명한 원감국사 충지가 1266년부터 주지를 지내는 등 중량감 있는 스님들이 거쳐 간 고찰이기도 하다. <성종실록>에 '15세기 중반 감로사의 노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로 절의 세력도 컸다. <조선금속총람>에도 '영조 때 '진남루'라는 누각을 24개 돌기둥으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조선 후기까지도 존재감을 가진 사찰이었다. <김해읍지>에는 '감로사의 암자로 남암, 중암, 서암, 도솔암, 백련암, 석수암 등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문헌상으로 감로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감로사의 위치와 관련,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신어산 동쪽 연못인 '옥지연'에 접해 있으며 1237년 해안이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감로사는 조선 말 폐사된 후 이젠 옛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상태다. 옥지연으로 추정되는 곳은 1970년대 개인에게 불하됐고, 이후 매립돼 공장이 들어서 있다.

감로사지에서는 널부러진 기와와 자기 파편만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산골짜기 한쪽 구석의 나대지에 불과하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고찰 터의 앞부분에는 공장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감로사지 인근에서 장군차 농사를 짓는 A(71) 씨는 "공장들이 들어서고 개발되면서 이제 절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감로사 내력을 아는 동네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 1970년대 동아대 석당박물관으로 이전한 감로사지 3층석탑. 동아대 석당박물관 정원에 있는 감로사지 귀부. 다른 석물과 함께 동아대 석당박물관에 있는 효화스님 승탑.(위에서부터)

감로사지 인근에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2011년 두류문화재연구원이 문화유적 조사를 실시해 만든 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출토된 기와와 자기를 통해 고려부터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건물터 등은 발견하지 못했다. 조사 보고서는 '2011년 건물 설립과 대지 조성 공사 때문에 원지형이 이미 훼손돼 (절터)유구가 분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조사는 건축을 위해 간단하게 진행했다. 실제 감로사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굴조사가 다시 진행될 필요성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감로사의 창건 시기가 고려시대라고 적시돼 있지만, 과거 흔적으로 보면 창건 시기가 더 이르기 때문이다. 부산과 김해, 서울로 뿔뿔이 흩어진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의 양식으로 추정해 보면 감로사의 창건은 통일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까지 감로사 폐사지에는 석탑 부재, 승탑, 귀부, 석등 등이 있었다. 이 유물들은 1974년 부산 동아대 박물관으로 모두 옮겨졌다. 지금 박물관 앞뜰 한쪽에 석탑과 승탑(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 귀부(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 받침돌) 등이 전시돼 있다. 이전할 때 석탑은 파손된 상태였지만 남아 있는 지붕돌과 하대석 등을 통해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승탑에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녹파당 효화 스님의 승탑으로 보인다. 귀부는 상단 비석이 소실된 상태로 박물관으로 이전됐다. 3층 석탑을 제외하고 보전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과거 감로사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동아대 석당박물관 박창열 학예사는 "1974년 당시 발굴조사를 하면서 유물을 가져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발굴기록인 지표조사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박물관에 남아 있는 기록이라곤 기증연도와 유물 목록 정도다. 당시 동아대 박물관이 부산·경남 지역의 유물보관지 역할을 한 만큼 김해군이나 상동면 등의 요청으로 들어온 경우가 아닐까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감로사 터에 있었던 석조여래좌상의 존재는 이목을 끈다. 경남 양산 용화사로 옮겨간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보물 제491호로 지정돼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감로사 폐사지에 있었던 것을 조선 말 낙동강 건너 양산 물금의 강변으로 옮겼다. 이후 1947년 용화사의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전해진다.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와 불상 후면의 광배가 모두 남아 있는 완전한 불상이다. 당당한 어깨, 가슴과 팔다리에는 비교적 입체감이 잘 표현됐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 윗부분에 작은 부처 1구와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에 비천상이 새겨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국보 제308호인 전남 해남 대흥사의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의 광배와 동일한 형식이다.

▲ 장군차 군락지 전경.

현재 문헌과 유물만 보면 감로사의 창건시기는 통일신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감로사지 바로 위에 서기 48년 가야의 허왕후가 인도에서 시집 올 때 가져왔다는 차 씨앗에서 유래한 장군차 자생군락지가 있는 만큼 가야시대에 감로사가 이미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감로사지 위쪽 언덕에는 가야시대부터 자생했다는 장군차 군락이 농로 주변으로 무성하게 형성돼 있다. 한 마을 주민은 "장군차를 제대로 우려내면 다른 차에는 없는 특유의 향이 난다. 그런 장군차에 옛날 사람들도 가치를 부여했을 것이다. 예전부터 감로사지 인근에 장군차가 자생해 온 만큼 절 이름의 유래도 장군차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 감로사지 뒷산의 장군차 자생 군락지 안내 표지판.

대성박물관 송원영 학예사는 "감로사의 감로가 '달 감(甘)'에 '이슬 로(露)'를 쓰는 것이 장군차를 뜻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감로'가 찻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근거가 발견되지 않은 만큼 설화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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