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0일 서울 국회에서 열린 '가야사·가야불교사 재조명 학술대회' 발제자들이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 고영섭 동국대 교수
“신나라 멸망 후 서해 거쳐 김해로
 가야 명칭, 붓다 깨친 진리의 고향
 허황옥, 홍도 인근·제주도 거친 듯”

 ■ 남재우 창원대 교수
“가야 영역, 경남북, 전남북까지
 일본 고대문명 성립 기여하기도”





김해시, 더불어민주당 민홍철(김해갑)·김경수(김해을) 국회의원, 동국대 세계불교연구회는 지난달 30일 서울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가야사와 가야불교사의 재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불자, 승려 등 400여 명이 참석해 가야사와 가야불교 재조명 움직임에 큰 관심을 보여줬다. 지역 불교계, 가락종친회 등의 인사들도 대거 참가했다.

동국대 이의수 부총장은 "이번 학술대회는 가야사, 가야불교의 중요성과 의미를 알리는 데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동국대는 김해시와 함께 왕후사지 발굴 등 다양한 학술교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민홍철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삼국시대를 넘어 한반도 역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소외되고 잊혀졌던 가야문화권이 새롭게 조명받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경수 의원은 "제4제국 가야를 복원하는 일은 김해시 혼자 감당할 수 없다. 이번 학술대회는 가야사를 복원하는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봉하마을을 소개하면서 자암, 부은암, 모은암 등 가야불교에 얽힌 사찰 이야기를 자주 했다. 아직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 부분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김 의원은 "가야사와 가야불교사를 복원하는 일은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드는 일 가운데 하나다. 고대 한일관계사를 바로잡고, 영·호남 화합을 위해서 제4제국 가야의 역사와 불교사가 역사로 인정받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축사에서 "사료의 발굴과 선택은 관점과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가야사와 가야불교에는 수많은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스토리텔링은 과거 가야와 가야불교의 성취와 꿈을 찾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밝혔다.

이날 학술대회 오전에는 동국대 불교학과 고영섭 교수가 '가야 명칭의 어원과 가야불교의 시원', 창원대 사학과 남재우 교수가 '사국시대 가야의 위상과 가야사의 지위'를 주제로 발표했다. 오후에는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가 '가야사와 고고학 자료의 발굴 현황', 동국대 불교학과 최경아 외래교수가 '남아시아불교와 가야불교의 접점', 동국대 세불연 정진원 연구교수가 '가야불교 인물의 발굴과 활동 분석', 동국대 국사학과 김복순 교수가 '가야불교와 신라불교의 특성과 차이'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기존 역사학계는 지금까지 확인된 증거를 중심으로, 불교학계는 다른 학문의 성과와 가능성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해 견해 차이를 보였다.

특히 동국대 고영섭 교수는 "김수로왕은 중국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온 인물이었으며, 붓다의 성지인 '부다가야'를 활용해 불교식 국명인 '가야국' 또는 '대가락'으로 정했다"면서 파격적인 견해를 주장했다. 반면 인제대 이영식 교수는 "최근 허왕후와 불교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다.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 요지.


■ '가야' 명칭의 어원과 가야불교의 시원 / 동국대 고영섭 교수

수로왕은 동이족의 일파인 소호김천씨의 후예로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김왕망(왕망)의 족당임이 분명하다. 그는 신나라 멸망 이후 지지세력을 이끌고 서해로 내려와 김해에 정착했다(42년). 그를 뒤따라온 허황옥 역시 왕망의 일파 혹은 그 족당으로서 두 사람은 혈족혼이 된다. 수로왕의 왕족에 대응해 허황옥(허왕후)이 3대까지 왕비족을 대변해 가는 현실에서도 알 수 있다.

수로왕은 중국 전한과 후한의 교체기에 대륙에서 서해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 김해로 건너올 정도로 국제정세에 밝았던 인물로 이해된다. 수로왕은 아마도 바다에 밝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AD 초에 서해를 건너오려면 해류 이해도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가야는 고대 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19세기 이후 서양에서도 가야로 불렸다. 인도에서 시작된 '가야'라는 명칭은 기원 이전부터 붓다라는 성인이 깨친 진리의 고향인 부다가야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다가야의 외연인 가야가 실크로드를 오갔던 전법승들과 상인들에 의해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로왕은 어떤 형태로나마 붓다와 부다가야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로왕은 부처의 성도지인 '부다가야'를 적극 활용해 불교식 국명인 '가야국' 혹은 '대가락'으로 나라 이름을 정하고(43년) 국제적 나라로 발전시키고자 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로왕이 가야의 새로운 왕성터를 '십육 나한이 살 만한 곳이며 일곱 성인이 살 만한 곳'이라고 한 것은 부파불교의 교리 이해에서 나온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불교적 세계관 속에서 가야를 건설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로왕 시절의 가야불교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왕이 불교를 알고 있었고 불교문화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나마 불교적 신행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왕후의 출자 문제가 가락불교의 가장 뜨거운 이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찐 대추 형상의 섬(증조·蒸棗)'으로 가서 찾기도 하였고, 방향을 바꾸어 멀리 '복숭아 형상의 섬(반도·蟠桃)'에 가 보기도 하였습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중)'

증조와 반도는 글의 문맥상 지명, 표적물이어야 한다. 망망대해에서 본 섬의 형상 묘사라고 봐야 옳다. 허황옥이 5월에 출발해 7월 27일 김해에 도착한 출자를 추적해 볼 수 있다. 그의 항로 예상도는 정상적인 해류와 구로시오 지류를 통해 볼 때 서해에서 남해로 건너왔음이 분명해 보인다. 증조는 홍도 최남단 '마부포 끄트머리'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섬 3개 가운데 82m 높이의 왼족 바위섬인 단오도로 추정된다. 그들의 배는 남해안 쪽으로 방향을 바꿔 간다. 양력 6~7월의 해류는 물길이 서해에서 동해로 꺾어도는 시점이다. '가락국기'에서 '이천(移天)'으로 표현한 것처럼 해류가 방향을 옮기면 시야에 들어오는 '복숭아 형상의 섬'인 제주도를 만나게 된다.

허황옥 부모가 수로왕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수로도 정해진 배필을 기다리고 있었던 정황을 보아 두 사람은 함께 전한을 무너끄리고 신나라를 건국했던 왕망의 일파, 족당으로 볼 수 있다. 허황옥이 중국에서 온 증거를 보여주는 대목은 아래에 나와 있다. '8월 1일 왕은 대궐로 돌아왔는데 왕후와 함께 연을 탔다. 중국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싣고…' 그렇다면 아유타국은 어디에 있는 소국이었을까. 중국으로 건너오기 이전의 인도 출자설은 현 상태로는 수긍하기 어렵다.
 

▲ 창원대 남재우 교수 등이 오전 주제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 사국시대 가야의 위상과 가야사의 지위 / 창원대 남재우 교수

가야사 연구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전라도 동남지역을 가야문화권에 포함시켰다. 이는 전북 남원, 임실, 장수의 발굴에서 나타난 가야 유물 출토 양상과 일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가야사 연구는 타율성론에 기반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상당 기간 가야사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고, 1980년대 이후에야 본격화됐다. 이때부터 가야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가야제국의 자율적 발전론 시각에서 접근했다.

현재까지 가야사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가야의 영역은 경남·경북의 낙동강 일대뿐 아니라 전남, 전북까지 최대 판도를 포괄했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완성하지 못한 미완의 왕국이지만, 생산력이나 기술 수준은 높아 700년 가까이 독자적인 역사를 지속했다. 가야의 문화는 일본 고대문명의 성립에 공헌하기도 했다.

다만 가야사 연구의 한계도 여전하다. 많은 연구자들이 가야사회의 발전 단계를 낮게 인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맹체설이다. 이는 가야를 고대국가 이전 단계로 보는 시각이다. 가야사회를 낮춰 본 이유는 가야의 여러 정치세력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멸망하면서 역사를 남기지 못한 영향이 크다. 끊임없는 문헌자료 재검토와 고고자료의 확대가 요구된다.




“인도공주론·가야불교 초전론, 유물·유적 발굴된 적 없는 설화 불과”


 

 ■ 이영식 인제대 교수
“학문적 검토, 논쟁과는 거리 멀어
 대성동고분군서 출토 전혀 안 돼
 장유화상 기술, 전형적 ‘연기’”

 ■ 최경아 동국대 외래교수
“허황옥 혼수품, 남인도산 가능성”

 ■ 정진원 동국대 연구교수
“지역 사찰 인도·남방불교 유물”





■ 가야사와 고고학 자료의 발굴 현황 / 인제대 이영식 교수

▲ 인제대 이영식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가야사 만들기'가 시작되는 듯하다. 지자체는 예산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기존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설화와 같은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 주장의 중심에는 허왕후의 '인도공주론'과 '가야불교 초전론'이 자리한다. 두 가지 설화를 역사로 주장하려는 입장은 학문적 검토, 논쟁과는 거리가 멀지만 상당한 생명력과 전파력을 갖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등의 (허왕후 인도 출신 관련)기술들을 고대사학계가 단순한 설화로 간주하는 것은 정밀한 관련사료 과정을 거친 결과이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김해에서 수많은 발굴조사가 진행됐어도 인도 계통 유물, 유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를 발견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왕후는 가락국 성립의 중심축을 담당했던 왕비족 수장이었다. 허왕후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가락국기'는 20여 명의 동행을 기록해 허왕후 집단의 존재를 전하고 있다. 허왕후뿐만 아니라 조광, 신보의 여식들은 2대 거등왕, 3대 마품왕의 왕비로 선택됐다. 이로써 허왕후 집단의 성격을 왕비족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락국 성립기의 왕권은 수로왕의 왕족과 허왕후의 왕비족으로 구성됐음을 알 수 있다. 허왕후는 왕비족으로서 초기 가락국 지배의 절반을 담당했던 집단이었다.

지금까지 김해에서 확인된 왕릉묘역은 양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이다. 이곳에서는 인도 계통 유물 출토는 보고된 적이 없다. 가락국 경영의 절반을 담당했던 허왕후 집단은 지배층의 무덤묘역인 대성동고분군에 묻혔을 게 분명한데 인도 유물은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야불교와 관련한 모든 기록을 섭렵해 보면 <삼국유사>가 쓰였던 고려시대 이전까지 소급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는 가락불교 전승이 있는 김해지역 모든 유적을 정밀 조사했지만, 가야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자료는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가락국기'에 있는 '질지왕 8년(452년) 허왕후를 기리기 위해 왕후사 등을 창시했다'는 기록에 주목하고, 5세기 중엽 아라가야의 경남 함안과 대가야의 경북 고령에서 연화문 금동판, 고분의 천정벽화, 연화문수막새가 확인된 것을 볼 때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 법흥왕 14년(527년)보다 80년 정도 이른 시기에 가야왕실에 불교가 존재했다고 추정한 연구는 의미가 있다.

허왕후와 함께 도래해 불법을 전했다는 장유화상은 1706년 '명월산 흥국사 사적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이어 1812년 서림사(은하사)의 '취운루중수기'에는 허왕후 오빠로 기술됐다가 1915년 장유사의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에는 허왕후의 남동생으로 기록됐다. '명월산 흥국사 사적비문'에는 '명월사를 중수할 때 '건강 원년'이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됐다'고 돼 있다. '건강 원년'은 후한 순제의 연호로 144년이다. 이런 기술이 사실이라면 가야불교의 기원이 무려 2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현재 실물이 전해지지 않아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는 사찰을 조영할 때 연원을 올리고 이적을 강조하는 '연기(緣起)' 작성의 전형적인 형식과 수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남아시아 불교와 가야불교의 접점 / 동국대 최경아 외래교수

인도에서 가야로 불교가 전래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키워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아유타국, 파사석탑과 쌍어, 장유화상이 있다. 한국어와 타밀어의 유사성도 또다른 근거로 제시된다.

이러한 쟁점 가운데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허왕후가 왔다는 아유타국의 현재 지명과 위치다. 불교가 직접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경우 아요디아가 인도 중부지역 사라유 강변의 아요디아가 왔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뤘다. 김해지역과 사찰에서 발견되는 쌍어문이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반면 허왕후가 남인도 출신일 것이라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수로왕이 시조인 김해김씨 족보와 <경상도지리지>에서 허왕후 출신지를 남천축국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허왕후가 남인도 출신이라는 근거다. 허왕후가 가야로 가져온 결혼 예물은 인고 최고의 비단생산지인 남인도 칸치푸롬에서 생산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가야불교 인물의 발굴과 활동 분석 / 동국대 정진원 연구교수

가야 관련 자료는 역사와 설화 사이에서 경계가 모호한 게 대부분이다. 1500년 전 신라에 정복된 나라의 기록을 새로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구전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무형의 자료들이 존재한다.

'가락국기'를 보면 수로왕이 가락국 왕으로 즉위한 시기를 4월 보름으로 볼 수 있다. 이 날은 인도, 네팔 등 남방불교에서 석가모니의 탄신일로 보는 날이다. 남방불교 전래의 요소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가락국기'에는 수로왕 즉위 첫 해 첫 궁궐터를 '십육 나한이 머물 만한' 상서로운 곳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곱 성인이 머물 만'하다는 대목은 도교적인 요소이기도 하고 불교적인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

가야불교를 대표하는 파사석탑과 지역의 여러 사찰들에 요니(힌두교 샤크티 여신의 상징), 링가(힌두교 시바 신의 상징) 등 인도나 남방불교의 유물들이 많은 점, 장유화상에 얽힌 사찰 창건 스토리텔링이 많다는 사실은 수로와 허왕옥의 불교적인 활동을 뒷받침한다. 최근 답사를 통해 부은사, 해은사 등에서 요니, 링가를 발견했다. 요니와 링가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또다른 상징으로 연상된다.


■ 가야불교와 신라불교의 특성과 차이 / 동국대 김복순 교수

사료에 기록된 수로왕 등 초기 왕들의 재위기간이 긴 것은 허왕후가 도래하면서 범력(梵歷)이 전래돼 1년 2배력을 사용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수로왕뿐 아니라 백제, 신라, 왜의 초기 왕들의 연수도 허왕후에 의해 전해진 범력에 따른 것일 수 있다.

금관가야의 제사는 거등왕 때인 199년부터 330년 동안 지속됐다. 이후 신라 문무왕의 조서로 제사가 재개된다. 문무왕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다. 그의 외가는 가야 왕족의 후예다. 문무왕이 김유신의 공을 높이 사서 금관가야의 제사를 재개한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신라의 가야문화 평가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661년 금관국이 제사를 이어가게 되고, 680년 금관소경이 설치됐을 때 가야의 역사를 기록한 <개황록>과 <개황력>이 편찬되면서 <금관경>을 부각시키기 위해 십육 나한설과 일곱 성인이 머무는 불연국토설이 정착됐을 가능성이 있다.
 

▲ 학술대회에 서울 및 지역 불교계, 가락종친회 관계자와 김해시민 등 400여 명이 참가해 행사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 종합토론

△고영섭 교수=수로왕은 1차적으로 대륙에서 산동반도로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가야사와 가야불교를 둘러싸고 다양한 이견이 나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앞으로 정합성을 통해 퍼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이영식 교수=<삼국유사>에는 가야가 42년 건립됐다고 나오지만 그 연대는 아직 입장이 정리돼 있지 않다. 가야의 시작을 3세기로 보는 고고학자도 있다. 문헌사학에서는 2세기로 보는 경우도 있다. 목관묘, 철기시대 교체 등을 감안하면 가락국의 시작은 이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계는 사료비판을 하는 만큼 기록을 다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미당 정인보 선생의 '건국신화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반영됐다'는 말에 동감한다. 다만 어떻게 반영이 돼 있느냐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

△국립해양박물관 백승옥 학예연구실장=10년 전 파사석탑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니 경남 일대에 흔한 돌이었다.

△가야불교문화진흥원 인해스님=최근 지질학을 전공한 박맹언 전 부경대 총장과 함께 파사석탑을 살펴봤다. 그는 "파사석탑은 적색 대리암이다. 강원도 정선에 극소량이 난다. 층위가 있어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돌이다"라고 했다.
 
김해뉴스 /서울=심재훈 기자 cy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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