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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사랑했던 허전 책 인쇄한 목판… 중국 삼왕·한국 제왕 사적 기록(13)취정재(就正齋) - 철명편목판
  • 수정 2017.09.13 10:43
  • 게재 2017.09.13 10:01
  • 호수 339
  • 11면
  • 조나리 기자(nari@gimhaenews.co.kr)
허전 선생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취정재. 찾는 시민이 드물어 늘 고요한 편이다.

 

김해도호부사로 내려와 3년간 머물러
선비, 백성 등 추앙 받으며 청렴한 생활
수로왕에 관심 기울여 임금 사액 받아내

향교 옆 취정재 장판각 <철명편> 보관
가로 30, 세로 19㎝ 총 57장 목판 형태
과거 찍어낸 책 없고 규장각 필사본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족들을 회유하고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며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고려의 태조 왕건을 비롯해 나라를 부흥시킨 왕 4명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웠다. 이 사당에는 '숭의전(崇義殿)'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조선은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의 위패를 모신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신라 박혁거세왕의 위패를 모시는 경주의 '숭덕전(崇德殿)', 백제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광주 남한산성의 '숭렬전(崇烈殿)' 등 역대 시조의 사당에 '숭(崇)'자 돌림의 이름을 사액했다. 

가야의 수로왕릉은 후손들 덕분에 전각 등 부속 건물이 조금씩 늘어났지만 고종 때까지는 시조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정식 인정을 받지 못했다. 수로왕릉의 사당인 숭선전(崇善殿)은 고종 15년인 1878년 고대 4국 중 마지막으로 임금의 사액을 받았다.

취정재 사당에 있는 허전 선생의 초상화 복사본.

사액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김해도호부사를 맡았던 성재 허전(1797~1886)이었다. 그는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한 뒤 김해를 살피다 가야 시조의 무덤인 수로왕릉이 사액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김해를 떠난 뒤에도 이를 잊지 않은 그는 고종에게 상소했다. 허전 덕분에 가야 왕조와 종묘 제도가 재확립된 셈이다.
가야 왕조 김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허전이 김해에 머문 시간은 김해도호부사를 맡았던 1864~1866년, 3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많은 선비들과 백성들이 유임을 원했을 정도로 그는 지역에서 추앙을 받았다. 당시 고종이 허전에게 내린 글에는 '경이 김해부에 부임하면서부터 선비들은 스승을 얻은 자랑이 생겼다. 이제 성적을 보니 백성들은 유임을 간절히 원한다. 진실로 옛날의 어진 수령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허전은 항상 몸을 단정히 해 백성을 만날 때도 평상복을 입는 일이 없이 항상 의관을 정제했다고 한다. 또 80세 이상 된 노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쌀과 고기를 내리는 등 백성을 보살피고 민심을 평안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사지를 게을리하지 않고 천시를 잃지 않고 지리를 버려두지 않으며, 노인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외로운 사람들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말고 윷이나 도박을 하지 않으며, 사납게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이치에 맞지 않는 소송을 하지 말며, 술에 취해 주정하지 말고 재물에 때묻지 말라.'

허전이 지은 <회유문>에는 단정하고 청렴한 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특히 남명 조식(1501~1572)의 사상을 따르는 강우학풍을 크게 발전시켰다. 1866년 2월에는 신산서원의 원장이 돼 남명이 수양했던 산해정을 찾아 문도들과 함께 강학했다고 전한다. 허전의 문하생을 기록한 <냉천급문록>에 등재된 제자만 해도 5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추앙받는 선비이자 스승이었는지 알 수 있다.

백성들과 지역 유림들의 유임 요청에도 허전은 임기를 마치고 부호군으로 임명돼 서울에 올라갔다. 그가 김해를 떠날 때 수백 명의 백성과 유생이 배웅하고, 몇몇은 그를 따라 서울에 올라가기도 했다. 허전은 1886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지역에 오래도록 남았다. 1927년 김해의 후학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취정재(就正齋)'를 건립했다.

'나아갈 취(就)', '바를 정(正)'을 써서 '바르게 나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는 취정재는 대성동 김해향교 왼쪽에 있다. 취정재에는 허전의 위패와 초상화 복사본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1728호인 초상화 원본은 경기도 용인의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초상화 속 허전의 모습은 노년이다. 관복 대신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착용하는 유복을 하고 있다. 꽉 다문 입술과 단호한 표정에 강직함이 잘 드러나 있다.

김해향교 유림들은 매년 음력 9월 9일 성재의 공을 기리는 '채례(采禮)'를 올린다. 김해향교 조희욱 총무는 "허전 선생은 정말 뛰어나고 큰 선비였다. 그가 후대에 끼친 영향을 볼 때는 삼헌관이 술을 올리는 '향례(享禮)'를 드리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헌관이 1명인 간소화된 채례를 드리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 총무는 "허전 선생 역시 김수로왕의 후손인 허 씨다. 그중에서도 양천허씨다. 허균, 허준, 허난설헌 등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허씨는 대부분 양천허씨였다. 허전 선생에게는 직계 후손이 거의 없다. 김해향교 유림들이 지역 선비들을 모시기 위해 만든 모임인 유계에서 취정재를 관리하고 채례를 지낸다"고 설명했다.

1890년 조판한 것으로 추정되는 철명편 목판.

허전의 위패를 모신 사당 바로 옆 장판각에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인 '허성재 선생 철명편 목판'이 보관돼 있다. 허전의 저서인 <철명편>을 인쇄한 목판이다. 목판은 허전이 세상을 떠나고 4년 뒤인 1890년 조판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조판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철명편>은 중국 고대의 삼왕에서 우리나라 역대 제왕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목판은 가로 30.2㎝, 세로 19.2㎝ 크기로 총 57장이다. 목판은 양면으로 돼 있어 책으로 찍어내면 114장에 이른다. 잦은 인쇄 탓에 목판의 끝 면인 마구리가 떨어져 나갔다. 120여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목판은 이리저리 뒤틀려 모양이 제각각이다.

김해시는 역사 보존을 위해 2015년 <철명편>을 여러 부 찍어냈다. 이중 일부를 김해향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철명편>을 살펴보면 중간에 빈 종이 6장이 보인다. 양쪽으로 찍어내는 목판 3판이 소실돼 중간 부분을 비워둔 것으로 추정된다. 목판은 실제로는 전체 60장이며, 이중 57장이 남아있는 셈이다. 2015년 찍어낸 <철명편>에는 글자가 많이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 부분도 많다. 습기에 약한 목판이 훼손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5년 찍어낸 <철명편>.

과거에 목판으로 찍어낸 책은 지금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에 2권 2책의 필사본만 남아 있다. 제1권은 중국 주문왕이 세자로 있을 당시 효행과 그 아래 제왕이 세자로 있을 때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했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제2권은 우리나라 조선 태조부터 역대 제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이 세자에게 교훈한 사적과 역대 왕이 백관을 동독(격려하고 독촉함)한 일을 수록하고 있다.

조은주 문화관광해설사는 "김해문화원에서 김해학, 김해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끔 취정재를 알고 찾아온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은 취정재를 묻거나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없다. 허전 선생 덕분에 김해가 하나의 왕국으로 인정 받은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야 왕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선 허전 선생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취정재 / 구지로 165(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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