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훈 마르떼 대표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관계가 항상 원만하지는 않다. 때로는 다툼이 있어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줄 때도 있고,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상황으로 변할 때도 있다. 거꾸로 서로의 불협화음이 극심한 피로감을 주어 관계의 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직업사전>에 따르면 '작곡가'는 음악의 장르를 구분하여 작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계획하고, 음악의 가사를 파악한 후 가사와 적합한 곡을 구상하며, 멜로디·리듬·화음·음악이론 등의 기초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악보에 그려내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곡가들은 곡을 쓰는 데 많은 고민을 한다. 흔히 사람들은 작곡가들이 아름다운 선율을 그려내는 데 가장 큰 고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고민하는 것은 아름다운 선율을 그려내는 게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바로 '불협화음'이다. 아름다운 선율 속 어디에 불협화음을 위치시키고 얼마나 적절하게 사용하고 어떻게 불협화음을 사용할지, 그리고 왜 그곳에 불협화음을 사용하여야 하는지를 분석·연구·고민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불협화음을 잘(?) 쓰는 일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불협화음이란 동시에 울리는 둘 이상의 음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음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도' 음과 '미' 음은 '장3도'라는 음의 길이를 가지는 협화음정이지만, '도'와 '도#'은 '단2도'라는 불협화음정 관계를 가지게 된다. 서로의 음정들이 화성학의 법칙 속에서 협화음정과 불협화음정들의 관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불협화음정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울리지 않는 음정일 뿐 틀린 음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음 안에서 '다른 음'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불협화음정의 사용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을 유발시킨다. 그 음악적 긴장은 몸을 자극시키고 곧이어 몸의 근육을 움츠려들게 만든다. 하지만 긴장은 계속되지 않는다. 음악 진행의 어법상 불협은 곧 협화음정, 즉 음악적 '해결'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게 되고, 우리는 '이완'이라는 명목으로 몸의 근육을 스스로 풀게 된다. 이러한 긴장과 이완을 음악의 구조 안에서 여러 번 반복하면 주어진 선율과 계획된 화음 안에서 철저히 계획되고 친절히 안내되는 음악적 카타르시스의 경험에 도달하게 된다.

불협화음은 흔히 고난, 역경, 분노, 슬픔, 역경, 좌절 등 부정적인 느낌을 극대화시키는 데 많이 사용된다. 이 모든 것들이 불협으로 길어지면 질수록 계획된 긴장은 뒤에 등장하게 될 계획된 '해결'을 더 극대화된 음악적 이완으로 이끈다. 이러한 맥락이 반복될 때 음악은 숭고한 예술의 경지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나랑 맞지 않는 사람. 나와는 다른 사람. 내가 바꿀 수 없는 사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며 그 관계를 포기할 때,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며 하난 말들이다. 음악적 상황과 맥락 속에서 불협화음은 누가 다른 음을 내는지 알 수 있지만, 일상 속에서의 불협화음은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나랑 맞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있을 경우, 어쩌면 내가 불협화음 속의 다른 음을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바뀌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관계에서의 불협화음이 협화음으로 해결되었을 때, 그 조화의 아름다움은 불협화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관계의 회복으로 다가온다.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관계를 포기하려 하지 말고 불협화음 속에서 내가 다른 음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돌아보고 협화음정의 음을 내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의 관계들도 어느덧 '예술'이 되어 있지 않을까.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해뉴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