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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과거에는 바다였다고?” … 김해에 남아 있는 가야흔적 찾기
  • 수정 2017.09.20 11:18
  • 게재 2017.09.13 11:08
  • 호수 339
  • 2면
  • 김예린 기자(beaurin@gimhaenews.co.kr)
김해내동초 학생들이 지난 8일 율하유적공원에서 인제대박물관 정찬우 학예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8일 내동초 '버스 타고 역사 탐험'
관동유적공원, 율하고인돌 등 방문



<김해뉴스>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인제대, 김해교육지원청과 함께 진행하는 '지역공동체캠페인'인 '버스 타고 떠나는 가야역사탐험대'가 지난 8일 첫 번째 탐험활동을 진행했다.

초·중·고교생이 참여하는 가야역사탐험대는 수로왕, 수로왕비릉, 은하사 등 가야, 지역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지를 돌며 역사 교육을 진행하는 행사다. 이날 첫 번째 탐험 활동에는 내동초(교장 박희문) 5학년 3반 학생 26명이 참여했다.

오전 9시 내동초를 출발한 버스는 관동동 '관동유적공원'과 덕정공원의 '아래덕정유적', 율하동 율하고인돌유적을 찾았다. 인제대박물관 정찬우 학예사가 동행했다.

관동유적공원은 삼국시대의 도로와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잔교시설, 지면식건물 구조 등의 유적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굴된 곳이다. 정 학예사는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삼국시대에 바다였다. 김해 봉황동과 관동동은 과거 선착장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과거 조상들의 중요한 생활터전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관동유적모형관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율하고인돌유적지로 향했다. 아파트 숲 한가운데 고인돌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정 학예사는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고인돌이다. 길이만 80m"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인돌은 순 한글이다. 무덤 위에 고여 놓은 돌이라는 뜻이다. 무게 1t인 돌을 나르기 위해서는 사람 14명이 필요하다. 큰 돌일수록 많은 사람이 힘을 써야한다.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청동기 시대 권력자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사람 한 명을 묻기 위해 이렇게 큰 고인돌을 설치했나요", "청동기 시대에 권력이 막강한 사람을 묻은 건가요"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이어 학생들은 율하유적공원으로 향했다. 율하지구 택지개발사업에 앞서 진행된 지표, 시굴조사 결과 청동기·가야시대의 고인돌, 지석묘 등 각종 무덤과 고상가옥 등이 2005년 대거 발굴됐다. 김해시는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율하유적공원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유적공원에 복원된 고인돌 단면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직접 관찰했다. 김태규 군은 "고인돌은 결국 사람 무덤이다. 무덤을 돌아보니 조금 으스스하다"며 웃었다.

율하유적공원을 살펴본 학생들은 6~7세기 마을 유적인 아래덕정유적으로 향했다. 이곳은 1997년 동의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했다. 6~7세기 집구조, 마을 형태를 복원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지다. 정 학예사는 "당시 마을에는 100명 정도가 모여 살았다. 인근에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땅에는 물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상가옥을 지어 살았다. 고상가옥은 곡식 등 음식 저장고로도 활용됐다"고 말했다.

박채영 교사는 "유적지가 공원으로 만들어져 있는 게 인상 깊었다. 일상생활에서 스쳐 지나갔던 공원의 유적 설명을 들어보니 정말 재미있다. 평소 역사시간에 질문이 없었던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나서 학예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많은 학생들이 탐험대에 참여해 생생한 역사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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