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 찾아 인터뷰 정리
위기의 순간 공동체 도움 중요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의 연구 중 하나. 노동자 차별 문제와 관련해 '취업 과정에서 차별을 겪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직장인 상당수가 '예' '아니요' 대신 '해당 사항이 없다'고 답한다. 이들의 건강상태를 비교 분석했더니 놀랍게도,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차별을 받은 이들보다 더 아픈 것으로 나타났다.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의 학교폭력 피해에 관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인다. '별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답한 남학생들이 학교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우울 증상을 보인 것이다. 차별 경험조차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약자 중의 약자 여성 노동자들, 강한 남자로 보이기 위해 스스로 괜찮다고 자위하며 폭력을 감내한 남학생들. 그러나 몸은 사회적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 교수는 '몸은 정직하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고 말한다.

'사회역학.'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이 분야는 질병의 '원인의 원인', 즉 사회적 원인을 찾아 구조적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길을 제시하는 학문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는 김 교수가 그동안 진행한 다양한 사회역학 연구 사례가 소개된다. 대상은 우리 사회의 약자 중에서도 약자들이다. 그는 천안소년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한 뒤 재소자 인권을 위해 구금시설 건강권 실태조사를 벌인다. 이 연구를 시작으로 2014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소방공무원, 지난해엔 세월호 생존자와 가족들을 심층 인터뷰했고, 동성애자 등 성 소수자 건강에 관한 연구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예상하듯 이들은 우울증과 자살 위험 정도가 높게 나타난다. 저자는 그 원인을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 트라우마 같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찾는다. 스웨덴의 경우 1991년 경제위기를 겪으며 10명 중 한 명꼴로 직장을 잃었지만, 자살률은 외려 꾸준히 감소한다. '적극적 노동시장 프로그램'으로 해고 노동자들의 구직을 도운 덕분이다. 실업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 쌍용차 사례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세월호 연구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외면해 왔던 참사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아이들의 증언을 통해 비윤리적인 언론의 취재 행태, 보상 문제를 둘러싼 오해와 갈등, 졸속적인 심리치료 프로그램 등 참사 이후 2차, 3차로 이어진 상처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해외의 연구 사례들은 우리 사회가 어디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 지역의 제조업체에서 진행된 금연 프로그램은 작업환경을 안전하게 만드는 노력을 함께 기울인 곳일수록금연 효과가 높게 나타난다. 남아공 콰줄루나탈 시골 마을의 기대수명은 에이즈 치료약을 제공하면서 7년 만에 12년이 증가한다. 반면 동유럽에서 IMF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들은 공공 의료시스템을 축소한 결과 주변국들보다 결핵 사망률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개인의 질병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질병의 원인은 그물망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여러 원인이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면, '원인 그물망'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저자는 질병이 공동체의 문제며, 사회적·정치적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로세토 마을의 심장병 연구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파산이나 사망 등 위기가 닥쳤을 때 이웃끼리 돕는 공동체 문화가 있던 로세토 주민들의 심장병 사망률은 옆 마을방고의 절반도 안 됐지만, 1960년대 공동체 문화가 붕괴되면서 그 수치가 급격히 치솟는다.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회 제도,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 준다. 비를 멈출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함께 비를 맞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부산일보 제공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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