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관음 성지 금산 보리암
원효대사 창건 시 세웠다는
삼층석탑, 가야불교 연결고리

역사학계 “고려 양식 관련성 낮아”
탑 일부 파사석 가능성 배제 못해
허왕후 일행 인도서 항해 때
평형수 역할로 싣고왔을 개연성

능선스님 “왜구 노략질 시달리던
민초들에 허왕후 이야기 위안”


 

경남 남해는 섬이지만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정주하던 지역이다. 전국에서 네 번째 큰 섬으로 농사와 어업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남해도 남쪽에는 해발 681m의 금산이 있다. 금산은 과거부터 소금강 또는 남해 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 가운데 유일한 산악공원이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기암괴석들이 군데군데 위치해 절경을 이룬다. 남해군 12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 이도 적지 않다.

금산은 원래 신라시대 원효대사의 기도처로 보광산이라고 불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젊은 시절 이 산에 수도하면서 백일기도를 했다. 나중에 그가 조선을 개국한 뒤 은혜를 갚기 위해 비단 '금(錦)'자를 써서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개명해 지금의 금산이 됐다고 한다.

이렇게 사연 많은 금산에 보리암이 있다. 조계종 13교구 본사인 쌍계의 말사다. 신라시대인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접한 후 암자 이름을 보광사로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인 1660년 현종이 절을 왕실의 원당(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법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개액(이름을 고친 편액(액자)을 내림)했다. 이후 절은 20세기 들어 수 차례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본전 역할을 하는 보광전을 비롯해 간성각, 산신각, 범종각과 요사채가 있다.
 

▲ 보리암 삼층석탑과 해수관음보살. 삼층석탑의 석재 일부가 파사석이라는 주장이 있다.

예로부터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 등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성스러운 장소'인 해수관음 성지로 꼽혀왔다. 특히 남해 보리암은 기도의 효험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소원을 비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보리암은 가야불교와 관련 있는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보리암에는 2개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75호인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과 제74호인 삼층석탑이다. 두 개 모두에 가야불교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다. 향나무에 금분칠을 한 관세음보살상 왼쪽에는 선재동자, 오른쪽에는 용왕이 있다. 높이는 46㎝, 폭은 23㎝에 불과하다. 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가 불상을 인도에서 모셔왔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이런 형식은 17~19세기에 유행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보리암 주지 능원 스님은 "이 곳에는 가야불교와 관련된 구전설화들이 전한다. 관세음보살상을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17세기 작품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삼층석탑은 가야불교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유물이다. 삼층석탑은 남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해수관음상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가락국 본거지에서 400리 이상 떨어진 남해 섬 남단의 기암절벽 위에 파사석으로 조성된 석탑의 존재는 가야불교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절벽 위에 자리한 이 탑은 비보(裨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비보는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이 있는 지역에 탑, 장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하는 것을 말한다. 이 탑은 커다란 돌 하나로 된 단층받침을 세우고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으며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식을 하고 있다. 각층 몸체의 사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에는 4단 받침이 있으며, 약간의 경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처리됐다. 꼭대기 부분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탑·석등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683년 원효대사는 금산에 처음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는 허왕후가 가져온 부처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이 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양식 또한 고려 초기로 추정되기 때문에 허왕후 부분은 신빙성이 약하다고 보고 있다.
 

 

▲ 화엄봉에서 바라본 보리암. 남해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이곳에 가야불교의 내력이 전한다.

 

이 탑의 일부 석재가 파사석이기 때문에 가야불교 이야기를 가진 탑의 내력이 사실이라는 주장도 있다. 삼층석탑의 3층과 4층의 면석은 파사석이라는 주장이 있다. 면석은 처마 모양의 옥개석 사이 돌이다. 3, 4층 면석은 다른 석재와 달리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의 설명처럼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부드러운 사암이다. 그래서 파사석으로 볼 여지가 크다는 이야기다. 파사석으로 조성된 석탑이 해풍에 풍화되자 화강암으로 석재를 교체했고, 지금은 일부 부재만 파사석으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신달호 자연환경해설사는 "탑의 양식만 보면 고려 시대 양식이지만 옥개석 사이 기단의 일부는 파사석이 아닐까 한다. 붉은 경석이어서 다른 탑재와는 색깔, 모양이 완전히 다르다. 원효대사가 보리암을 창건할 당시 김해에서 파사석을 가져왔다는 설화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는 대목이다. 인도에서 장거리 항해에서 평형수 역할을 하는 파사석이 적지 않게 배에 실려 왔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능선 스님은 가야불교 관련 설화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이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 그는 "김해 인근 사찰뿐 아니라 하동의 칠불사도 가야불교와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이곳도 가야불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지만 현실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보리암 관련설화는)허왕후가 해로를 통해 들어 왔다는 설화가 다른 이야기와 섞이면서 확장된 형태로 전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바닷가에 있는 불상이나 석탑은 (뱃길을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했다. 또한 부처가 있는 땅이면 신령한 기운으로 항해에서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남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이었다.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린 주민들에게 멀리 인도에서 건너온 파사석으로 만든 석탑과 불상이 존재하다는 이야기는 사실관계를 떠나 힘을 주고 위안이 됐다는 것이다.
 

김해뉴스 /남해=심재훈 기자 cy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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