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청청문화회 장유옛길탐방대 대원들이 김우락 대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유하동 하손마을 조개더미 ‘유하패총’
제의 치른 뒤 생활쓰레기 버리던 장소

중국계 청동솥 등 발견된 양동리고분군
발굴 후 공장 설립 과거 흔적 없어

‘가곡산성’으로 불린 둘레 800m 양동산성
분산성과 함께 김해 지키던 역사적 장소

 

"삼한시대 흔적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서울과 경기에서는 이 시대를 초기철기시대라고 부르고, 전라도에서는 마한시대라고 부릅니다. 철기시대 구야국이었던 김해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대청천문화회(회장 조래욱) 장유옛길탐방에 나서기 전 김우락 탐방대장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탐방대원들에게 일정을 설명했다. 대청천문화회 장유옛길탐방 네 번째 행사는 장유 유하동 유하패총에서 시작했다. 초기철기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먹고 버렸던 조개무지 '유하패총'을 살펴보고 주촌면 양동리 양동리고분으로 향한 뒤 공장이 빼곡이 들어선 공장 숲을 헤치고 양동리와 내삼리의 경계에 위치한 양동산성을 걷는 일정이다. 답사거리는 약 5.53㎞다.

내덕동에서 서쪽으로 주촌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하손마을'이라고 적힌 큰 표지석이 서 있어 자연마을이 있음을 알려준다. 표지석을 뒤로 왼쪽 방향으로 500m 걸어가면 경남도기념물 제45호 유하리 패총이 있다.

"지금 여러분은 과거 김해만 바다 위에 서 있는 겁니다." 김 대장이 말했다. 곧장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넘실대는 황금빛 들판은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로 변하고, 일행은 그 위를 신선이 노닐 듯 유유히 걸어간다. 김 대장을 선두로 바다 위를 걸어 낮은 구릉에 있는 유하리 패총을 향해 이동한다.

공장과 주택 사이로 난 임야를 따라 비탈을 오르자 발 밑은 온통 조개껍질이다. 밭을 가로질러 좀 더 깊이 들어가자 '유하리 패총'을 알리는 표지판이 덩그러니 서 있다. 유하리 패총 일대는 온통 밭으로 개간돼 있어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었다.

▲ 한 탐방대원이 유하패총에 떨어져 있는 굴껍질을 살펴보고 있다.

발끝에 채이는 조개껍질은 굴, 재첩이 대부분이다. "굴 껍질이 사람 얼굴보다 더 크네." 탐방대원 김정은(50·여·삼문동) 씨는 커다란 굴 껍질을 손에 들고 신기한 듯 요리조리 살펴본다. 다른 탐방대원 눈에도 호기심이 가득하다. 김미숙(54·여·무계동) 씨는 "장유에 28년간 살았다. 이런 유적지가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신기해했다.

김 대장은 "유하리 패총은 철기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난 뒤 버려 만들어진 조개더미다. 2000년 전 김해 사람들이 먹었던 조개들이다. 조개는 칼슘 때문에 잘 썩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15년 대성동고분박물관과 국립김해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2015년 발굴조사단은 유하리 패총을 단순한 생활쓰레기장이 아니라 제사 등의 제의를 치른 뒤 생긴 쓰레기를 버린 장소로 봤다. 패총 위 구릉 정상부가 제의 장소로 추정되고 있다. 유하리 패총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지만 패총임을 알리는 시설은 표지판 하나뿐이었다. 이마저도 바람에 풍화돼 너덜너덜했다.

김 대장은 "유하리 패총은 옛날 남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곳이었다. 발굴조사단은 이곳에서 열린 제의가 해상교역과 관련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우리나라 패총 중 제의에서 나온 쓰레기가 나온 곳은 유하리 패총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제 남해고속도로를 넘어 양동리고분군으로 간다. 양동리고분군이 온통 공장으로 바뀌어서 허망할 수도 있다"며 발길을 옮겼다.

주촌면 양동리 243번지. 양동리고분군이 위치한 곳이다. 남해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주촌면 가곡마을로 향했다. 가곡마을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 초록 들판이 펼쳐졌다. 우거진 잡초를 밟고 100m 정도 걸어 들어가자 '김해양동리고분군'이라는 표지판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국가 사적 제454호인 양동리고분군은 1969년 마을 뒷산에서 토기가 일부 노출되면서 발견됐다. 당시 중학생들이 우연히 거울과 칼자루 끝장식을 발견한 것이다. 1984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 동의대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등이 여섯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무덤 620여 기에서 6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됐다. 이곳은 기원전 2~5세기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김 대장은 "이곳에서 중국계 청동솥, 일본계 토기 등이 발굴됐다. 구야국이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 번성한 해양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동리고분군은 유하리 패총, 나중에 가볼 양동산성과 함께 고대 국제도시로서 가야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양동산성에 복원되지 못한 돌들이 너부러져 있다(왼쪽 사진). 탐방대원들이 양동산성 위를 느긋하게 걷고 있다.


국가 사적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양동리고분군은 멀리서 보면 잡초와 잡목이 무성한 야산에 불과했다. 표지판이 없다면 누가 양동리고분군이라는 것을 알기 힘들었다.

김 대장은 발굴이 끝난 곳으로 가 보자며 높은 옹벽으로 둘러싸인 공장을 지나쳤다. 그의 말처럼 발굴이 끝난 지역은 기계소리만 요란한 공장들로 가득했다. 가야 형성기로부터 발전기까지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양동리고분군에 '귀중한 유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부끄러웠다.

허무한 마음을 뒤로 하고 공장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양동산성에 가기 위해서는 600m 가량 등산로를 걸어야 한다. 주촌면 양동리와 내삼리의 경계가 되는 산봉우리에 양동산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등산로는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 때문에 걷기가 쉽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30분 정도 걷자 켜켜이 쌓인 돌무더기들이 눈에띄었다. 양동산성 한 쪽은 복원사업을 해서 산성의 모습을 갖췄다. 다른 한쪽에는 뾰족한 돌덩이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김 대장은 "경남도기념물 제91호인 양동산성은 문헌상 '가곡산성'으로도 불린다. 산성의 둘레는 약 800m다. 성벽의 높이와 폭은 각 2.5m다. 여기서는 김해평야와 낙동강 하구를 조망할 수 있다. 분성산성과 함께 김해를 지키던 곳이다. 하손마을 유하리패총, 양동리고분군, 양동산성은 해상왕국 가야를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라고 설명했다.

▲ 유하리패총-양동리고분군-영동산성 경로.

산성에 섰다. 불모산이 바로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산성 아래는 층층이 공장들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장유 1동의 전경이 펼쳐졌다. 산성 위로 부는 가을바람에 방치된 유적들에서 느낀 씁쓸함을 실어 보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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