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천 년 동안 묻혀 있던 토기 파편의 흙을 손으로 털어내고(왼쪽), 붓으로 쓸어내는(오른쪽) 고고학도 청년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포클레인에서 이쑤시개까지, 인간이 쓸 수 있는 도구란 도구는 모두 동원해야 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이다. 역사 유적을 발굴하는 현장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섬세한 붓질로 세월의 더께를 털어내기만 하는 근사한 장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큰 삽으로 흙을 퍼 올리고, 쪼그리고 앉아 꽃삽으로 흙을 긁어내기도 한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릉처럼 거대하지 않지만, 김해에도 그 현장은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박물관 오른쪽 언덕 위는 지금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붓질을 할수록 선명해지는 토기 무늬, 좁쌀만한 구슬 놓칠까 조심스런 손길

처음에는 그냥 땅에 박힌 돌멩이인 줄 알았으나 계속 붓질을 하는 동안 토기의 형태가 드러났다. 그 손길을 사진기자가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붓질을 하던 한 청년이 한마디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속아서 낚인 거죠. 고고학과에." 옆에서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던 청년들이 웃으며 말을 보탰다. "영화도 한몫 했지. '인디아나존스'라고." 발굴조사에 참여한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남학생들이다. 그들은 가야시대의 석곽묘를 햇빛 아래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각자 맡은 영역에서 흙을 파내고 걷어내고 있는 중이다. 붓질을 할수록 토기 표면의 무늬가 조금씩 드러났다. 토기 제작 과정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무늬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여학생들이 쪼그리고 앉아 트롤(미장에 쓰는 막손·꽃삽과 비슷함)로 땅바닥을 조심스럽게 긁어내고 있다. 땅바닥 몇 군데는 못을 박아놓았다. 구슬이 출토된 자리다. 좁쌀만한 구슬들이 땅바닥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것이다. 목걸이였는지, 팔찌였는지, 장신구 어딘가에 장식되어 있었던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하나라도 놓칠세라 흙을 긁어낸다. 긁어낸 흙들은 따로 모아두었다. 혹시 구슬이 섞여 들어갔을 수도 있으니 물에 씻고 체에 받혀 구슬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고분군 산책로 길을 따라 내려오던 한 가족이 멈춰 서서 발굴현장을 신기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김해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방학 숙제를 하느라 대성동고분군박물관을 찾아왔다가 우연히 발굴현장을 발견한 가족이다. 김다은(김해대곡초·5) 양은 "발굴 장면을 처음 보는데 너무 힘들어 보인다"며 핸드폰을 꺼내어 촬영을 했다. 동생 동건(5)이도 누나 못지않은 관심을 보였다. 어머니 조근희(어방동·36) 씨는 김해로 이사를 온 덕분에 가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김해에 와서 가야문화와 역사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도 보면서 가야에 대한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데 알면 알수록 왜 사국시대라 하지 않고 삼국이라 하는지 안타깝다"며 가야를 더 많이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경주에 가보면 신라관광유적지들이 많다. 그런데 김해는 '가야, 가야' 말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일반인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가야유적은 적다는 생각이 든다"는 지적도 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발굴현장을 보니 정말 김해가 가야의 고도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는 어머니와 아이들은 한동안 발굴 과정을 지켜보다가 떠났다.
 
김해의 가야유적지로는 수로왕릉이 대표적이다. 옛 김해 읍내의 아이들에게 그곳은 친숙한 놀이공간이기도 했다. 가야의 유적지에서 그냥 놀기만 한 것이 아닌 사람도 있다. 발굴현장을 지휘하는 송원영(김해시 문화재 박물관 담당) 씨가 그렇다. 송 씨는 초등학생 시절 수로왕릉은 물론이고, 대성동고분군의 한 동굴에서도 놀았다. 동굴은 동네 아이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구슬이며 딱지를 보관하는 은밀한 본부였던 그 곳이 후에 알고 보니 도굴된 석곽묘였단다. 또 하나의 비밀 장소인 백운대고분군 동굴 역시 도굴된 석실묘였다. 중학생 때는 만장대 일대에서 간혹 발견되는 조선시대 엽전을 주우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부터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고, 부산대학교 고고학과에 진학했다. 부모님들은 "기껏 대학 보냈더니 남의 묏등이나 파고 앉았냐"며 한심해 하기도 했지만, 송 씨는 가야와 인연이 있었던가 보다. 1993년 방위병 시절, 구지로 공사현장을 지나치다 토기가 그대로 노출되고 방치되어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고고학도였던 송 씨가 방위병 신분으로 이를 신고하여, 공사가 중지되고 유적 발굴을 시작하게 한 일이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김해시청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문화재담당자로 근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송 씨는 어린시절 비밀 아지트가 있던 곳으로 돌아와, 가야의 비밀을 연구하고 빛을 보게 하고 있다.
 

 

 

▲ 대성동고분군박물관 오른쪽 언덕 위의 발굴조사 현장.

발굴현장에는 관련자가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는, 회칠로 표시한 발굴 구역이 있다. 그 구역은 인간의 손길이 닿은 인위적 구조물과 유물이 있는 땅이다. 그런 것이 없는 땅(생토)과 구분하기 위해 선을 그어둔 것이다. 시대의 경계, 땅의 쓰임새의 경계,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경계선 안의 유적을 다시 드러내는 일은 장시간 계속되었다. 사람이 쌓은 돌의 구조와 땅에 묻힌 유물이 잘 보이도록 흙을 걷어내고 쓸어냈다. 잠자는 방보다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 그렇게 정리한 뒤에는 실측을 위해 실로 표시를 하고, 5m는 되는 사다리 위에서 현장을 정면 아래로 내려다보며 촬영을 한다. 촬영된 사진을 바탕으로 모눈종이 위에서 발굴현장을 정확하게 다시 그리는 전문가도 있다.

유물정리실로 옮겨진 파편들이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작업에 들어가면 옛 가야가 김해의 땅에서 다시 태어난다

 

발굴현장과 주변에서 나온 토기 파편은 어디에서 발굴된 것인지 번호가 매겨진 다음, 유물정리실에서 다시 정리된다. 무늬가 있는 것은 탁본을 뜨고, 깨진 것은 원형을 복원한다. 원형을 복원하는 담당자의 책상에는 그만그만한 토기의 파편들이 가득하다. 옆에는 항아리 윗부분이 절반쯤 복원된 것이 있다. 항아리를 한참 들여다보고, 책상 위 파편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한 조각을 들어 대어본다. 다행히 제자리이다. 종이테이프로 조심스럽게 고정시키고 다시 책상 위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일이다. 박물관 유리 전시관 속에서 보았던 가야의 토기들이 그렇게 복원되었던 것이다.
 

 

 

▲ 발굴현장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김다은 학생과 가족.(왼쪽) 토기 파편을 맞춰보며 깨진 토기의 원형을 복원하고 있다.(오른쪽)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이 중요하고, 도굴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어디에서 발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유물은 그 형태가 완전하다 해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되어 그 가치가 반감된다. 어느 시대에, 어떤 신분의, 무엇에 쓰인 유물인지 밝혀내야 비로소 유물다운 유물이 되는 것이다. 송원영 씨는 "역사는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김해에서 가야 유적을 수차례 발굴했다. 회현동 패총은 무려 십 여 차례 발굴 당했다. 일본이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조선을 식민지화 한 것은 자신들의 옛 영토를 찾기 위함이라고 국제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계획적으로 발굴한 것이다"며 가야 유적 발굴 보존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고구려 역사를 통째로 빼앗아가려는 중국의 동북공정, 독도와 가야 역사를 유린하려는 일본의 야심 앞에 분노하면서도 우리는 유적을 덮어버리려 할 때가 있다. 개인 소유의 땅에서 유물이 출토되면 발굴비용을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현 매장문화재 관련법도 문제가 있지만, 그대로 파묻어 버리려 하는 사람들의 역사인식도 개선돼야 할 것이다.
 
"김해는 파기만 하면 뭔가 유물이 나오니, 참 골치 아픈 땅"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뒤집어보면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김해의 땅 모두가 가야유적이고 신라와 조선의 유적이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지역이라는 말이다. 대성동고분군의 발굴현장이 들려주는 말이다. 그곳에서 옛 가야가 21세기 김해의 땅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 Tip 제6차 학술발굴조사

"가야 멸망 원인 밝혀 줄 석곽묘에 학계 관심 고조"

전국 기초단체 중 최초로 문화재청에 발굴전문기관으로 등록된 김해 대성동고분군박물관은 가야사 연구자료와 박물관 전시유물 확보를 위해 지난 7월 27일부터 대성동 고분군 제6차 학술발굴조사를 시행중이다. 현재 가야시대 석곽묘 1기를 비롯한 목곽묘, 목관묘, 옹관묘 등 약 10기의 무덤을 확인했다. 이 가운데 가야 멸망 원인의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는 뚜껑돌이 덮혀 있는 석곽묘 1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매우 높다. 가야사 저변확대와 매장문화재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해 발굴현장도 공개하고 있다. 조사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3시 두 차례에 걸쳐 30분 간 학예사의 설명으로 관람할 수 있다. 발굴현장 진입은 불가능하지만, 원거리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발굴성과가 가시화 되는 추석 무렵 시민을 대상으로 현장설명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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