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태우 김해뉴스 사장

40년 전 어릴 때 추석 명절은 즐거우면서도 고달픈 하루였습니다. 큰댁은 시골에 있었습니다. 대다수 가정에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어서 추석 때 큰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성큼성큼 앞서 가면서 수시로 저를 뒤돌아보셨습니다. 그 때는 아버지 발걸음이 왜 그렇게 크고 빨라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들, 여동생은 추석 때 큰댁에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다지 여유있는 시절이 아니어서 큰댁에 가는 버스비를 내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편이 많이 나쁜 해에는 아버지와 저도 큰댁에 가지 못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가면 이른 아침인데도 무슨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며 서 있으면 버스회사 관계자가 행선지를 적은 손간판을 들고 와서는 "×× 가시는 분들 여기 줄 서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눈치만 보고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우루루 손간판 뒤로 달려갔습니다. 앞에 서야 버스 좌석에 앉아 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어찌나 빠르던지 아버지와 저는 늘 줄 맨 뒤에 섰습니다. 큰댁까지는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힘들게 큰댁에 도착하면 그제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큰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산에 올라 성묘도 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습니다. 나름대로 잘 살았던 큰댁에서는 음식을 많이 장만했기 때문에 명절이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할머니와 큰댁 형수가 떡, 전, 부침, 과일 등을 싸주기도 했습니다.

큰댁에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큰댁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대 있었습니다. 막차는 오후 6시였습니다. 이 버스를 놓치면 하루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내로 나오는 버스는 늘 만원이었고, 때로는 차문을 닫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명절이라서 버스 운전기사는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대개 오후 7시가 넘을 무렵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큰댁에서 받아온 음식을 건네주면 누나들, 여동생이 우루루 와서 나눠 먹곤 했습니다. 피곤해서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잠에 곯아 떨어지면 그 해 추석은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40년이 흐른 지금, 아버지는 팔순을 넘겨 거동하기도 불편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저와 함께 큰댁에 가시지 못합니다. 저는 아내, 아들, 딸과 함께 버스 대신 자가용을 몰고 큰댁에 갑니다. 지금도 추석 아침에 출발합니다. 돌아오는 시간은 이전보다 이릅니다. 낮 12시만 되면 우리뿐만 아니라 큰댁에 모인 사촌, 오촌 조카 등 친척들은 서둘러 돌아가기 바쁩니다.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하다 추석맞이로 분주한 부원동 새벽시장 앞에서 종이상자 몇 개를 손수레에 싣고 허리를 굽힌 채 힘들게 차도를 걷는 한 어르신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등이 굽어 허리를 제대로 못 펴는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과거 추석 때 잰 걸음으로 앞서 걷던 때와는 다른 뒷모습입니다. 평생 가정을 지켜야 했던 아버지의 부담이 등을 짓눌러 허리를 펼 수 없게 만든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중에는 언제나 후회하기 일쑤입니다. 아버지, 오래 사세요. 올 추석에는 고향에 가면 아버지에게 다른 선물보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도 이 시대의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이해하고 가정에 행복만 가득한 추석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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