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준비 노심초사했던 엄마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지”

하성자 · 김해시의원

 

▲ 하성자 · 김해시의원

추석이 다가올 때면 젊었을 때 근심어린 엄마의 얼굴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추수를 하기 전에 추석이 오는 해는 걱정이 더 커진다는 것을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눈치챘다. 음력 8월이면 엄마의 근심에 앞서 내가 먼저 엄마를 근심하곤 했다. 차례를 모시기 위해 최소한 한 말 정도의 쌀은 마련해야 했다. 밥 지을 쌀 한 주먹조차 없는 형편을 아는 처지라 추석빔 같은 것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동네에서 비교적 살림이 괜찮았던 5촌 당숙 집 안마당 쌀퉁구리에는 추수가 끝날 때에도 두어 가마 정도의 묵은 벼가 항상 채워져 있었다. 5촌 당숙은 보릿고개 너머 벼 추수 때까지 찾아오는 동네 집들마다에 쌀을 빌려주곤 했다. 추수를 끝낸 동네 사람들은 가장 먼저 이자에 상응하는 웃전이 붙은 쌀을 갚으러 당숙 집을 들락거렸다. 설이 지나고 봄이 깃들 무렵부터 쌀두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험한 보릿고개 살림을 견뎌냈던 엄마는 소풍날이나 제사 날 같이 긴요할 때마다 당숙 집에 쌀을 빌리러 가곤 했다.

추석은 추수한 뒤 하늘에 감사드리는 의미로 비롯됐다는 책을 읽은 뒤부터 왜 추수도 하지 않았는데 팔월 보름날이라고 해서 추석 차례를 지내야 하는지 혼자 의문하곤 했다.

엄마는 손이 커서 유별나게 음식을 많이 장만했다. 추석날 아침 차례는 대소가를 한 바퀴 둘러 우리 집에서 순서가 마무리됐다. 우리 집 차례를 지내고 나면 늘 어중간한 점심시간이어서 대소일가 분들이 우리 집에서 점심도 해결하고 오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물론이려니와 먹성 좋은 집안 오빠, 언니들은 엄마가 만든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하면서 많이 먹었다. 엄마가 망설임 끝에 당숙 집에 찾아가 빌린 쌀은 추석 당일 거의 소진되었고, 사흘쯤 지나면 보리밥 위에 별같이 하얗던 쌀알 몇 톨마저 아예 사라졌다.

5촌 당숙 부잣집 음식은 대충 먹는 시늉만 하고 쌀조차 없어서 빌려서 겨우 차린 가난한 우리 집 음식은 왜 유난히 더 많이 잡수실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곤 했다. 당숙 가족이 명절 때마다 우리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아 엄마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엄마는 추석은 그렇게 나눠 먹어야 좋은 거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 집 음식이 깔끔하고 맛있긴 했다. 가난 속에서 후덕한 인심을 놓지 않았던 엄마는 이제 팔순을 앞둔 할머니가 됐다. 엄마는 명절 차례 준비에 노심초사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 때도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송편 쌀 장만'이란 말이 우리 동네 보편적 경제용어였던 보릿고개 시절을 더듬어 보니 그 시절이나 '추석물가'란 말이 뉴스가 되는 지금 시절이나 힘들게 사는 이에게 있어 체감경기의 매운 맛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풍족한 시대라지만 형편이 그리 녹녹하지 않은 살림을 간당간당 살아내는 이 시대 엄마들의 고충을 헤아려 본다. '명절증후군'도 그러려니와 '명절 물가'에 주눅 드는 주부의 심정을 살펴 주고 기꺼이 공감해 주면 좋겠다. 정을 나누는 가운데 간소하면서도 범절 있는 추석맞이 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가마솥에 송편 찌던 옛 추석 그리워

나갑순 · 수필가

 

▲ 나갑순 · 수필가

고향 어머니의 너른 품 같은 둥근 달이 분성산 위에 두둥실 걸렸다. 풍요로운 계절, 고요한 달빛은 '세상은 힘들고 시끄럽지만 행복하여라. 사랑한다'라며 위로하는 듯하다.

명절이 되면 도로가 막히는 불편함에도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 행렬들은 가족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유추하며 위로의 공간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같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와 함께했던 시간들, 뒷산의 밤나무, 그리고 텃밭에 덩굴째 누워 있는 누런 호박, 우~우 하며 대숲을 흔들고 지나던 바람, 감나무에서 툭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던 추억들이 고달픈 현실에 안식을 주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추석이 다가오면 분주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이는 일가친척들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오일장을 바삐 오갔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사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부담이었을 게다. 철없던 우리들은 명절이 어서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친척들이 주는 용돈에 대한 기대와 명절에나 겨우 얻어 입을 수 있는 새 옷, 새 신발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송편 빚을 쌀을 미리 불렸다가 방앗간에 줄을 서서 기다려 떡가루를 빻아 왔다. 반죽을 하고 팥과 밤, 깨로 소를 넣어 솔잎을 깐 큰 가마솥에 쪘다. 우리는 신나게 술래잡기를 하다 가마솥에서 술술 김이 나면서 구수한 냄새가 코 끝을 스치면 서로 먹겠다고 난리를 치며 커다란 가마솥 뚜껑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추석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차례를 지낸 뒤 삼촌, 숙모 들과 함께 조상이 누운 선산으로 성묘를 갔다. 멀고 힘들었지만 사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도토리도 주우며 산길을 올랐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부모와 삼촌들은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다. 사촌들도 멀리 있어 소원하다. 우리가 뛰어 올랐던 선산에는 개발의 바람이 불어 신축 빌라들이 들어서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산소를 오가며 꺾어 왔던 억새 까치밥, 숲길을 걸을 때마다 후루룩 날아다니던 메뚜기. 그 시절이 그립다.

올해도 어김없이 명절 추석이 찾아왔다. 바쁜 일상에서 옥신각신 부딪히며 지내던 부산한 일들을 잠시 내려놓고 고향 들판이 주는 햇볕과 바람으로 익어가는 풍성한 열매들을 보면서 세상의 고달픔을 잊는 즐거운 명절이었으면 좋겠다.



사촌들과 산, 들로 뛰어다니던 즐거운 추억의 하루

정현대 · 팔판문화연구회 회장
 

▲ 정현대 · 팔판문화연구회 회장

장유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장유에서만 산 토박이다. 지금 장유의 풍경은 이전과 다르다. 어린 시절 장유는 깨끗한 차로보다는 울퉁불퉁한 길에 나지막한 시장 풍경이었고, 논이 많았다. 추석만 되면 그 길을 따라 사람을 빽빽하게 태운 버스가 타지에 가고, 타지에서 오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민족 대이동이었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만원 고속버스를 보면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났다.

다행히 우리 큰댁은 진례면이었다. 아버지 삼형제는 큰집인 진례에 모였다. 대가족은 아니었지만 전체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송편을 빚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그 때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큰집 마당에 동그랗게 앉아 송편을 빚었다. 누가 더 예쁜 송편을 빚나 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큰집에는 큰 가마솥이 있었다. 송편이 다 빚어질 때쯤 가마솥에 불을 때 솔잎과 함께 송편을 쪘다. 투박한 송편이었지만 다 함께 만들었던 송편은 참 달고 맛있었다.

송편을 다 만들고 난 후에는 또래 사촌들과 산과 들로 뛰어다녔다. 한 마을에 TV 하나도 없었던 시절, 재미있는 놀이는 자연에 있었다. 추석 당일에는 온 가족이 다같이 윷놀이를 하거나 제기를 차면서 놀았다. 그 때는 왜 그리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던지 헤어질 때가 되면 다음 설에 다시 만나자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명절이라도 옛날 같은 분위기가 안 나는 것 같다. 가족 행사는 간단하게 하고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팔판문화연구회는 이처럼 사라지는 전통문화를 발전, 계승시키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추석 때 반룡산에서 여는 만날제도 이런 행사다. 만날제는 출가한 딸과 친정어머니가 서로의 집 사이에 있는 고개에서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누던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다. 지금은 자동차로 편하게 이동하고 전화도 할 수 있는 편한 세상이 됐지만, 전통을 나누면서 가족의 의미와 정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김해뉴스/ 추석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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