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불구불 이어진 분산성 아래로 흐릿한 미세먼지에 뒤덮인 김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둘레 900m 테뫼식 성벽, 가야 때 조성 추정
‘고려 시대 왜구 침입 막으려 축조’ 첫 기록
<대동여지도> 등 조선시대 여러 서적에 등장

허왕후 창건설화 서린 해은사 인근에 위치
충의간 ‘만세불망비’ 정현석 등 공적 적어
대형 바위에 새긴 ‘만장대’ 흥선대원군 친필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일 정도로 산세가 두루 발달돼 있다. 자연스레 도성, 읍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이 산에 축조됐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전국 곳곳에 2000여 개의 크고 작은 산성이 있다고 한다. 김해 어방동에 있는 분산성은 지역에 남아 있는 사적 제 66호 산성이다.

산성은 축성 위치에 따라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성벽을 쌓는 방식의 테뫼식, 성벽 범위 내에 계곡을 포함시켜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구전이 가능하도록 한 포곡식으로 나뉜다. 한 마을이 산성 안에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은 당연히 테뫼식 산성보다 면적이 넓다. 청나라와 장기간 대치했던 남한산성은 포곡식 산성이다. 반면 분산성은 대표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 둘레가 약 900m로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돌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분산성은 성벽을 쌓은 방법이나 성에서 수습되는 토기편 등으로 볼 때 가야 때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이 성을 쌓았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640여 년 전이던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해부사 박위가 성을 수리해 쌓았다는 것이다. 분산성은 임진왜란 때 무너졌고, 고종 8년인 1871년 김해부사 정현석이 다시 쌓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외에 <조선왕종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조>, <김해부읍지>, <김해부내지도>, <대동여지도> 등에 분산성이 기록돼 있다.

'분산산성', '분산성', '분성산', '분산' 등 비슷비슷한 이름이 많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성'으로 끝나는 이름은 분산성을, '산'으로 끝나는 것은 분성산을 의미한다. 김해의 진산(주산)인 분산을 분성산이라고 하는 것은 김해의 옛이름이 분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해의 고읍성을 뜻하기도 하는 분성이 어디냐는 데에는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고 한다. <김해부내지도>에는 분산성의 정상이 '산성봉'과 '타고봉'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분성산이 '분산'이라고 기록돼 있기도 하다.

산꼭대기에 광범위하게 조성된 분산성을 가장 편하게 찾아가는 방법은 길이 잘 닦인 가야테마파크에 차를 세우고 분산성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분산성 내에 위치한 해은사를 검색해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분산성은 둘레가 900m로 그리 크지 않은 산성이지만, 큰 바위와 나무가 협곡처럼 이뤄져 있어 곳곳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편한 운동화에 단출한 차림이 적합하다. 방문하기 좋은 시간을 추천하자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다. 김해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 허왕후가 이곳에서 노을을 보며 고향을 그렸다고도 한다. 김해낙동강레일파크의 '왕의 노을'과 한 쌍을 이룬다.

가야테마파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좁은 흙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분산성 동문이 보인다. 성곽 쪽으로 탁 트인 김해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감탄이 절로 나온다. 현재 반듯하게 지어진 성곽은 김해시가 2001년부터 산성 정비를 하면서 복원한 것이다. 현재 동문에는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띠가 둘러져 있다. 복원 사업 중 성벽 일부가 무너지는 바람에 복원 사업은 중단된 상태다.

분산성 성곽을 따라서 한 바퀴 돌면 김해는 물론 멀리 부산과 창원까지 눈에 들어온다. 성곽뿐 아니라 성 내에도 숨은 보물이 가득하다. 적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고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지은 산성에는 당연히 진아, 군기고, 막사 등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 분산성에 남아있는 건축물은 해은사가 유일하다.

▲ 분산성을 쌓는 데 일조한 사람들의 업적을 기리는 충의각.

해은사의 창건설화에 따르면 이 절 역시 2000년 전 가야시대에 지어졌다. 이 절은 허왕후가 배를 타고 가야에 온 뒤 풍랑을 막아 준 바다와 해신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해은사에는 특이하게도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을 모시는 대왕전이 있다. 대왕전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정을 눈여겨 볼 만하다. 왕과 왕비의 근엄한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다. 수로왕릉에 있는 수로왕 허왕후의 영정과 같은 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영정 옆에는 쌀 그릇 위 작은 돌이 있다. 돌 위에 쌀을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도 있다고 한다. 해은사 뒤편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파사석탑 적멸보궁이 있다. 둥근 봉오리 모양의 중심부 위에 비슷한 크기의 작은 돌을 하늘을 향해 쌓아놓은 듯한 특이한 모양이다. 이는 인도의 스투파 형식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해은사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보면 충의각이라는 전각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분산성을 쌓는 데 힘쓴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비석은 4기다. 왼쪽 2기는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다. 김해부사 정현석이 분산성을 보수한 후 이를 허가해 준 흥선대원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비석에는 고려말 정몽주가 분산성을 주제로 쓴 글도 새겨져 있다. 세 번째 비석은 고려말 분산성을 보수한 박위 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했다. 마지막 비석은 분산성을 보수해 쌓은 정현석 부사의 공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건립했다. 김해문화원은 1990년 비석을 모시는 비각을 세웠다. 매년 10월 28일 충의각에서 정현석 부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제례를 지낸다.

▲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와 낙관이 새겨졌다는 '만장대'.

성의 남쪽으로 수풀을 헤치고 가다보면 '만장대(萬丈臺)'가 적힌 바위가 나타난다. 만장대는 분산성의 또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길이나 되는 높은 곳'이라는 뜻의 칭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바위에는 정갈하고 힘 있는 '만장대'라는 글씨와 낙관이 새겨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바위에 누가 어떻게 글씨를 새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해 김해문화의전당 김해학동아리 회원들이 산성 탐방을 하던 중 자연 암벽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발견하고 김해시에 알리기도 했다. 분석 결과 박동완, 오의, 박덕권, 김영년 등 18명의 이름이었다. 1873년 분산성 개축 당시 공사 감독 등의 이름으로 확인됐다.

만장대 바위 근처에는 봉수대가 있다. 20년 전 쯤에는 가야문화연구회가 분산성에서 풍선을 올리고 그 모습이 진영 봉화산에서 보이는지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야문화연구회 소속 오미숙 씨는 "봉수대는 전쟁 신호를 주고받던 곳이다. 풍선을 이용해 실험한 결과, 분산성에서 풍선을 올리는 모습이 진영 봉화산에서도 잘 보였다. 과거 불을 이용해 신호를 주고받았을 모습이 그려진다"고 말했다.

▲ 분산성 만장대 인근에 세워진 봉수대.

분산성에는 동서남북 문이 하나씩 있다. 이 중 남문은 암문이다. 몰래 산성 안팎을 다닐 수 있도록 돼 있다. 서서히 노을이 지면 성곽에 붉은 빛이 반사돼 더욱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산세를 타고 세워진 성곽은 구불거리는 용과도 닮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어둠이 짙어져 김해의 야경이 다 드러난다. 분산성에서 바라보는 김해의 전경이 김해9경 중 하나라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조은주 문화관광해설사는 "분산성에서는 수로왕릉, 봉황동유적지, 망산도, 김해공항 활주로가 한눈에 보인다. 이 곳에 올라 한 바퀴만 돌아도 가야 역사와 김해를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분산성의 노을은 10월에 가장 예쁘다"고 설명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분산성 / 가야로 405번안길(어방동 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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