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노예제, 인권 유린 상징에
문화·예술·혁명 각성제 역할도



커피의 위세는 대단하다.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자주 마시게 된다는 커피. 그만큼 중요한 삶의 일부가 돼 버렸다. 혹자는 "커피는 한 시절 유행이 아닐까"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커피는 후퇴를 모르고 한없이 질주해 왔다. 돌이켜 보면 커피만큼 인류로부터 사랑을 받아 온 식품도 흔치 않을 듯싶다. 미국의 작가 마크 펜더그라스트는 "합법적으로 거래되는 원자재로서 지구에서 오일(원유) 다음으로 두 번째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 커피"라고 말하기도 했다. 커피는 우리에게 맛과 향뿐만 아니라 그 뛰어난 향미만큼 풍성한 이야기를 피워내는 묘한 마력도 지녔다.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된 커피. <커피인문학>은 바로 커피를 통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책에서 커피는 도구일 뿐이다.

인류는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이를 두고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오래도록 경쟁을 벌였다. 아프리카냐 아라비아반도냐, 그리스도 국가냐 이슬람 국가냐의 자존심이 걸린 논쟁이기도 했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했지만, 최초로 재배한 곳은 예멘'이라는 절충안이 나왔다. 저자는 "혹 모를 일이다. 역사가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커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노예 참혹사'다. 17세기 유럽 국가들은 부를 안겨줄 새로운 상품을 찾고 있었다. 소금, 향신료, 설탕, 담배, 면화 등 오랫동안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던 상품들의 구매력이 떨어질 때쯤 커피가 등장했다. 커피나무를 심고 키우고 열매를 많이 수확하려면 그만큼 인력이 필요했다.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식민지의 인력을 노예로 동원했다. 커피는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인권 유린과 참혹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도 흥미롭다.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마신 인물은 고종 황제가 아니었다. 고종 황제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참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어처구니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관파천보다 10여 년 앞선 1886년, 관료이던 윤치호는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커피집)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오다'라고 적었다.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885년 펴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1884년 1월 한강변에서 커피를 접대받은 사연을 기록했다.

커피는 사상과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커피는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각성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카페는 민중의 혁명 의식을 고취한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최초의 '카페 르 프로코프'는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백과전서>가 처음 기획된 장소이자, 이후 이 책이 완간될 때까지 계몽사상가들의 아지트로 활용되었다.

커피가 지닌 계몽의 힘은 조선 땅에서도 작용했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다방을 차린 인물인 영화감독 이경손은 1927년 안국동 네거리 근처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열었다. 카카듀는 일제강점기에 시대적 각성과 조선인 간 문화 교류를 시도한 곳이었다.

근대 유럽의 예술·정치인들은 카페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때때로 밤새워 토론했고, 그 결과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이 세상에 나왔다. 각성의 음료, 커피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은 아침식사를 위해 준비한 커피에 정확히 원두 60알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의 테이블에는 악보 용지 한 장과 끓는 커피가 있었다. 이처럼 시대의 역사이자 예술 문화가 융합된 현재의 시그널이 바로 커피인 셈이다.

커피는 이제 전 지구를 대변하는 음식이 돼 버렸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커피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비록 커피 자체는 인문학의 영역이 아니지만, 여기서 파생된 근대사회의 현상은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책은 커피도 얼마든지 인문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김해뉴스
부산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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