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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100년 세월 버텨낸 강학 공간… 교육·항일운동·구휼에 힘써(15) 월봉서원(月峯書院 ) ①
  • 수정 2017.11.15 09:38
  • 게재 2017.10.25 09:14
  • 호수 344
  • 9면
  • 조나리 기자(nari@gimhaenews.co.kr)
▲ 한 모녀가 1917년 설립된 월봉서원 대청마루 앞에서 따뜻한 가을 햇볕을 즐기고 있다. 현재 역사·문화 교육공간으로 사용되는 이곳에는 인근 주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1917년 세워져 근대한옥 특징 잘 드러나
월헌 이보림 선생 거주하며 학문 익혀
영남지역 기호학파 본거지로서 상징성

일제 저항해 전통 의관, 머리카락 지켜
먹고 살기 어려운 주민들도 극진히 대접
인문학 강좌, 음악회 진행해 문턱 낮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음식점, 커피점 들이 생겨나는 율하카페거리 주변에는 아파트 단지가 줄지어 서 있다. 카페거리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덕정사거리 인근에도 부영이그린타운 1·3단지, 부영6단지 등 아파트가 빼곡하다. 이곳에서 덕정마을 방향으로 100m만 들어가면 의외의 공간이 나타난다. 장유주민이라면 한두 번은 방문한 적이 있을 '월봉서원(月峯書院)'이다.

처음 세워진 지 올해로 100년이 되는 서당이다.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로,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으로 역사가 이어지고 새마을운동부터 민주화운동 및 김해를 거치는 동안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켜온 서원이다. 놀라운 것은 격동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 이보림이 학문을 익히고 강학했던 일신재.

덕정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가장 눈에 먼저 띄는 것은 어른 키보다 낮은 높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인 옛 가옥인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49호 일신재(日新齋)다.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였던 월헌 이보림(1903~1972)이 거주하면서 학문을 익히고 강학했던 곳이다. 일신재의 좌측에는 골목길이 있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지금도 글소리가 끊이지 않는 월봉서원이 보인다.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일신재 맞은편에는 이보림의 아들인 화재 이우섭(1931~2007)이 학문을 연마했던 연강재(蓮岡齋)가 있다. 연강재에는 19세기 때부터 내려온 고문서와 간재 전우(1841~1922)의 초상화가 보관돼 있다. 각각 도 문화재자료와 유형문화재 자료다.

이 중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곳은 월봉서당이다. 서당이 교육기관을 뜻한다면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을 기리기 위한 공간을 두루 일컫는다. 월봉서원 입구로 들어가 사랑채인 봉양재(鳳陽齋) 뒤편으로 가면 월봉서당이 있다. 1917년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이보림의 가문은 100여 년 전부터 서당을 운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현재 관동중이 세워져 있는 자리에 있었던 봉산 서당, 일신재의 일신재 서당을 거쳐 지금의 월봉서당까지 지어진다. 1984년 전국 유림이 뜻을 모아 이보림의 사당인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하면서 그의 호를 따 월봉서원으로 이름을 붙이면서 서당 역시 월봉서당으로 불리게 됐다.

정면 5칸으로 툇마루와 대청, 실내공간을 적절하게 배치한 월봉서당은 근대 한옥의 특징을 모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축사적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를 조종으로 하는 서인 중심의 학파였던 영남지역 기호학파의 본거지로서의 상징성과 역사성이다.

이보림은 기호학파 마지막 학자로 일컬어졌던  전우의 가르침을 따라 전통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은 거의 마지막 세대의 유학자다. 조선 중종의 5남인 덕양군의 후손인 이보림은 1903년 장유 덕정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부 농은 이경현(1859~1936)과 부친 봉정 이승기(1885~1945)의 가학을 배우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둘째 아들이면서도 조부의 사랑과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보림의 집안은 조식학파와 퇴계학파로 이어지는 영남학파가 두드러진 경상도에서 여전히 기호학파의 노론 집안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17세였던 1920년 전북 부안 계화도로 전우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당시 전우의 나이는 79세였다. 이보림은 전우의 문하에 있던 제자들 중 최연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 전우는 이보림을 받아들인 지 약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보림은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동문인 혁재 서진영과 석농 오진영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며 간재학파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보림은 계화도에서 김해로 돌아온 후에도 영·호남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문화교류를 이어갔다. 이런 문화교류는 월봉서당에 있는 고문서 중 <월헌가서찰>에 잘 남아있다.

▲ 일제에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의 상징인 태극 갓통.

일제는 민족 전통과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1908년 서당을 철폐하고,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소학교를 세웠다. 또 단발령을 강행했다. 이보림은 일제에 의해 서당이 사라지고 전통 교육이 힘을 잃어갈 때 이에 저항해 한학 교육을 이어갔으며, 전통 의관과 두발을 지켰다. 팔각의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는 선비 갓통은 월봉서원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품이다. 일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갓통에는 단발령에 맞서겠다는 뜻인 이보림의 갓이 보관돼 있다. 갓통 겉의 태극 문양은 그가 직접 그려넣은 것이라고 한다. 가목인 유자나무는 역시 갓통과 마찬가지로 월봉서원에 깃든 전통과 정신의 상징이다. 그의 절개는 "우리가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 오직 '수사선도(守死善道·죽기를 각오하고 도를 지킴) 네 자를 써서 액자로 붙여 두어야겠다"며 제자들에게 비통해했다는 일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보림의 손자인 부산대 한문학과 이준규 교수는 "일제 때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일본 순사가 찾아와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서당으로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50대 때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지팡이 아래에 쇠가 달려 있어서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지팡이 쇳소리만 들어도 안심했다고 한다. 서당에 누가 오더라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고 근엄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월봉서원과 일신재는 교육, 항일 활동 외에도 구휼에 힘썼다. 조선시대 때에는 이보림의 집안이 장유 지역 땅의 절반을 갖고 있다고 할 정도로 부유했다. 이 때문에 먹고 살기 어려웠던 주민들이나 거지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보림은 가난한 이들을 내치지 않고 대접했다고 한다.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은혜를 잊지 않고 선행비를 세우기도 했다. 정부에서 내린 정식 비석은 아니지만 김해 지역에 이름 모를 이가 세운 비석이 8개나 된다.

이 교수는 "한 번은 할아버지가 자신을 칭송하는 게 민망하다며 밤중에 머슴에게 비석을 파오라고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 비석에는 '굶어 죽을 뻔 했는데 하느님(이보림을 의미)이 나타나서 살려주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 흑백사진 속에 남아 있는 수십 년 전 일신재 돌담길.

이보림의 집안은 이후 갈수록 기울었다. 그의 아들 이우섭의 부인이자 이 교수의 어머니가 시집을 왔던 1950년 무렵에는 가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교수의 부친은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도 한국전쟁 때에는 피란민들을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월봉서원 고문서에는 피란 때 숨겨준 선비와 인연을 맺어 주고받은 내용이 남아 있다.

후학을 양성하고 베풀면서 살았던 가문의 전통과 명예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월봉서원은 인문학 특강, 다도 교실 등 10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서원의 문턱을 낮춰 음악회 등을 열어 많은 이들이 서원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조상들은 재산을 줄이더라도 교육과 구휼을 줄이지 않았다.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정신을 본받아 더 많은 이들이 서원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나 김해시의 지원사업을 적극 활용해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곳에 선비마을이 생겨 많은 시민들이 전통과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월봉서원 / 덕정로 77번길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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