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시와 인제대 인간환경미래연구원은 지난달 28일 김해문화원에서 '가야불교 관광콘텐츠 개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허성곤 김해시장, 배병돌 김해시의회 의장과 시의원, 지역불교계 관계자와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허성곤 김해시장은 축사에서 "고대 역사를 되짚는 것이 김해의 정책성을 찾는 길이다. 이번 학술대회의 결과물이 가야고도를 복원하는 데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바라밀선원 주지 인해스님은 "김해지역에는 '가야'가 원형 그대로 묻혀 있다. 가야불교를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가야문화'라는 큰 틀로 받아들인다면 고대사의 인식이 바뀌게 될 것이고 관광콘텐츠 개발에도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날 발표 요지.

 

▲ 지난달 28일 김해문화원에서 열린 '가야불교 관광콘텐츠 개발 학술대회'에서 바라밀선원 주지 인해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리 부산대 강사
“아유타, 불교 4대 학파 논쟁지
 인도행 현장, 절·승려 대거 목격”

■ 이진아 환경작가
“가야, 양쯔강까지 세력 뒀을 수도
 일본인 다수 한반도 남부 출신”

■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배 등장 기출변은 조만포일 수도
 수로왕 세운 왕후사는 태정마을”


 

■아유타의 불교적 함의 / 유리 부산대 강사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허황옥의 출신지로 나오는 아유타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유타라는 지명은 국내에서는 가락국기, 인도에서는 대서사시 <라마야나>, 중국에서는 진제의 <바수반두법사전>, 승만 부인의 <승만경>, 무착이 지은 <현양선교론>, 현장의 <대당서역기> 등 불교 관련 문헌에서 발견된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불교 4대 학파 논사들이 4~5세기 치열하게 논쟁한 곳이 아유타로 밝혀졌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7세기 중국에서 인도로 건너간 현장 법사의 눈에 비친 아유타에는 절이 100여 곳 있었다. 승려도 3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보다 앞선 4~5세기 유가행파의 사상을 완성한 '세친', 설일체유부의 대표 논사인 '중현' 등 등 주요한 논사들이 아유타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아유타는 불교학의 산실 같은 곳이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비판적 고찰 / 송재근 창원대 강사
'가락국기'는 대부분의 가야사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중요한 문헌이다. 가야 관련 문헌 기록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가야만을 다룬 유일한 고대 사료이기 때문이다.

가락국기에는 불교가 삼국보다 일찍 가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내용들이 나온다. 수로왕이 16나한과 7성을 언급했다는 내용, 허황옥(허왕후)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사실, 왕후사 창건과 장유사 관련 내용 등이다. 여기서 16나한이란 용어는 가락국기에서 말하는 1세기가 아닌 7세기 이후 용어다.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의 기록도 제시되지 않아 신뢰성이 약하다.

가락국기는 한 국가의 역사 기록이라기보다는 김해김씨 가계를 우상화하는 측면이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가락국기를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락국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구가 나와야 한다.


■가야사 복원을 위한 새로운 역사학의 제언 / 이진아 환경작가
1970년대 재야사학자 이종기 씨가 '가락국기'를 재해석한 이후 가야 연구는 꾸준히 이어졌다. 가야라는 국가연맹체의 내용과 외연의 정의도 더욱 확장되고 있다. 가야는 신라에게 패망한 낙동강변의 조그마한 나라가 아니라 22개 이상의 국가 연맹체를 갖고 있었던 존재였고, 일본 규슈 지방을 세력권에 두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수용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야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뛰어난 철기 생산기술과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한반도 동해 연안, 중국 양쯔강 유역까지를 세력권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가야가 번성했던 500년 동안 한반도 남부 지역은 온난기였다. 환경역사학적으로 엄청난 기회의 시기였다.

2012년 일본 산케이신문에 게재됐던 '일본인 유전자 게놈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일본 본토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가야와 일본이 고대에 연계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야는 그리스 시인 호머가 '오디세이아'에서 이상적인 해상국가로 묘사했던 '파에아키아'처럼 '(낙동)강을 양쪽 기슭에 사이에 두고 항구 도시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가야의 해상 소국들은 육지의 좁은 땅을 두고 경쟁하기보다 바다로 나가 협력했다.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에 한반도는 동아시아 전체를 세력권으로 하는 집단의 본거지였음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선진사회를 형성하는 지역이었다. 최첨단 철기 문명을 매개로 아마도 동아시아 뿐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전체와 해상교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통해 문화 강국으로 입지를 다졌을 것이다. 
 

■가야시대 김해 일원의 고환경 연구 / 류춘길 한국지질연구소 소장
김해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후인 756년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에 신라의 작은 수도 격인 '김해 소경'이 설치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가야는 2000년 전 김해에 있던 구야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전기 가야연맹체에서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자연환경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김해평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구 일원은 신석기 시대 이후 최근 역사시대까지 '고 김해만'이라고 하는 내만이 발달했던 바다 환경이었다.

가야가 성립된 1세기 중엽 김해평야 일원은 바다가 육지 속으로 들어온 내만이었다. 내만의 북서쪽에 위치한 장유에서 주촌에 이르는 지역은 해안 굴곡이 심해 곳곳에서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만 입지가 발달했다. 동력이 없는 고대 선박이 연안에서 항해하려면 조수를 이용하는 게 기본이었다. 내만의 다른 지역에 비해 장유에서 주촌에 이르는 지역은 수심이 낮은 탓에 조석 차가 커서 항해에 유리했다.


■허황옥의 가야 도래 경로 /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은 허황옥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유천간과 신귀간에게 망산도와 승점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가락국기에는 유천간이 허황옥 일행의 도래를 관측한 장소인 '망산도', 망산도에서 올린 횃불 신호를 왕궁으로 전하기 위해 신귀간이 대기했던 '승재', 허황옥 일행을 태운 배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기출변', 일행이 처음 배를 댄 '주포' 등의 지명이 등장한다.

가락국기 '금관성파사석탑'조를 기본사료로 삼고 조선 중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김정호의 '대동지지', '대동여지도' 등을 함께 분석해 허황옥 일행이 가락국 남쪽 해안에 도래한 후 육상으로 이동한 경로를 확인했다. 

김정호에 따르면 망산도는 김해읍성 남쪽 대부교 동쪽의 전산도로 여겨진다. 전산도 남쪽의 죽도도 외해에서 들어오는 배를 관측하기 유리하다는 점에서 후보지가 될 수 있다. 

망산도에서 올린 횃불 신호를 기다리던 승점은 지금은 활천고개로 추정된다. 활천고개가 가락국 성립기에 형성된 부원동 유적의 배후에 위치한 구릉이고, 과거부터 역사가 자리할 정도로 교통의 요충이었던 점을 고려했다.

허황옥의 배가 모습을 드러낸 기출변은 현재 조만포 인근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전산도에서 외해 쪽으로 바라면 죽도의 북서쪽과 덕송산 서쪽으로 조만포가 보인다. 허황옥 일행이 배를 대고 뭍에 오른 주포는 배를 댄 포구가 산 밖에 있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현재의 범방동, 미음동, 생곡동 사이 내만 가운데 한 곳일 가능성이 높다. 수로왕이 허황옥을 만나 혼인해 세운 왕후사는 현재 응달리 태정마을 일원으로 추측된다.


■가야불교 문화관광 콘텐츠 개발을 위한 철학적 제언 / 권서용 인제대 강사
흔히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기원후 6세기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남반도 남쪽에 고급문화를 만들고 향유한 고대국가였다. 500년 간 존재했지만 사대주의적 역사관 때문에 가야 역사는 잊혀진 역사가 됐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시작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일제 강점기 민족 사학자들에 이르러 가야는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다른 삼국과 마찬가지로 가야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 체제는 불교가 담당했다.

초기 불교의 연기사상은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 화해, 상생이라는 가치를 함의하고 있다. 허황옥이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부은암, 모음암, 해은사 등과 같은 가야불교 사찰의 유래에서 전통적인 효 문화가 강조됐다.   

이러한 정신문화적 가치는 현재 남아 있는 가야불교의 다양한 흔적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야불교 문화관광 콘텐츠 개발에 있어 가야와 가야불교의 정신세계를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직 가야사의 발굴과 복원이 진행단계인 만큼 앞으로 가야와 가야불교 콘텐츠를 활용한 관광 상품화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김해뉴스 /정리=심재훈 기자 cy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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