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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왕후 '허구' 치부 네거티브 접근하면 가야사 실체 접근 어렵다”가야불교 뿌리를 찾아서 (25)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인터뷰
  • 수정 2017.11.22 10:42
  • 게재 2017.11.22 10:35
  • 호수 348
  • 11면
  • 심재훈 기자(cyclo@gimhaenews.co.kr)
▲ 옥스포드대에서 박사 학위 취득 후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허왕후에 천착하는 김병모 이사장.

 

인도에서 가야로 불교가 처음 전래됐다는 '가야불교'는 허왕후의 인도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다. 하지만 여전히 사학계, 고고학계에서는 허왕후가 인도로부터 왔을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인식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1994년 <김수로왕비 허황옥>을 시작으로 2008년 <허왕후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등 여러 저작을 통해 허왕후의 인도 도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김 이사장의 도발적인 질문은 이후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인도에서 온 허왕후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했다.
김 이사장은 허왕후 일족이 인도에서 도래해 중국을 거쳐 가야에 닿았다는 주장을 견지해 왔다. 인도 허황옥의 나라 아유타국은 기원전 세워진 인도 코살국의 중심 도시 '아요디아'이고, 이후 중국 한나라와 흉노세력의 대립으로 아요디아의 지배계급이 동쪽으로 이주해 중국 사천성 안악현(보주)에 정착했다. 이후 보주에서 출생한 허황옥이 서기 47년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가락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직접 바다를 건너왔다는 주장과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두지만, 허왕후 세력이 인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다.
김 이사장은 한국인으론 선구적으로 1978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7년에는 아시아권 최초로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종신회원이 된 그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 한양대 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김해뉴스>는 8월 17일 경기도 하남의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허왕후의 인도 도래와 가야불교를 주제로 김 이사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1940년생으로 이제 희수(喜壽)를 지난 노 학자는 그동안 답사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997년 인도 타슈켄트와 파키스탄을 다녀온 수첩 첫 페이지엔 세계지도, 모기약, 청심환, 비타민 등의 준비물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인도를 다녀올 때마다 남긴 수첩이 10개에 이르렀다. 그동안 가야와 인도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오래된 기억이었다.


 

1985년 KBS팀과 현지답사
허왕후 이야기 국민에게 알려

비판만 하는 역사 전공자들
인도서 증거 찾는 의지 부족

중국 건너간 로마군단 실체 밝혀졌듯
허왕후도 언젠가 공인받는 날 올 것

1970·80년 함께 허왕후 흔적 찾던
허명철 이사장, 대성 스님 보고 싶어


 

-역사학계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가야, 그 중에서도 허왕후 이야기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처음 내가 김해 김 씨 라는 점 외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1961년 대학에 입학한 후 김해에 내려가 수로왕릉을 처음 가봤다. 능묘를 관리하는 참봉이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국제결혼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줬다. 이후 당시 국문번역이 안 된 <삼국유사>에서 가야 관련 내용을 찾아보면서 '신화인가', '사실인가' 실체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검은 편이다. 아마도 인도 할머니의 유전인자가 남아있어서일 것이다. 4만 년 전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 간 아메리칸 인디언은 장구한 세월에도 유전인자가 그대로 얼굴에 남아있다. 아유타국과의 인연은 50여 년 전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렇게 인도를 10번 다녀왔다.
 


-10번 인도 현지를 답사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1970년대 인도 국제팬클럽대회에 참석한 이종기 씨가 기차를 타고 아요디아를 제일 먼저 방문했고, 내가 두 번째로 찾았다.
 
1985년 KBS 피디와 함께 인도, 스리랑카 현지를 가서 6부작 특별 프로그램 '간다라'가 제작됐다. 2부로 아요디아 편이 나왔는데 인도 공주가 가야의 왕비가 됐다는 사실은 당시 시청자들에게 쇼킹한 충격을 줬다. 시청자들은 과연 인도에서 왔을까. 많은 이들이 충분히 관심을 가질 테마인데 이를 뒷받침할 연구가 여전히 부족한 것이 아쉽다. 인도에 한 번 갔다 오면 한 달씩 아팠다. 요즘엔 아스팔트 도로도 생기고 현지 사정이 많이 개선됐지만, 1980~90년대에는 흙먼지와 위생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가장 최근 방문은 2016년 11월 고려사이버대 영상 제작을 위해 인도를 다녀온 것이다.
 


-현재 인도 아요디아에는 불교 흔적이 거의 없다.

△당연하다. 오늘날 아요디아 주민의 90% 이상이 힌두교를 믿고 있다. 과거 타 종교에 배타적인 이슬람 세력도 아요디아 지역을 침범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불교 흔적이 남아있긴 힘들다. 하지만 아쇼카 대왕이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슌가 왕조가 기원전 200년 경부터 아요디아를 다스렸다. 당시 통치이념은 불교였다. 북쪽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그레꼬 박트리아 왕국 세력이 히말리야 산맥을 넘어와서 슌가 왕조가 초토화되면서 아요디아 통치세력도 붕괴했다. 허왕후 일족이 고향을 떠나 이민을 갔다면 불교와 함께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란 학문 자체가 활자에 의존한다. 허왕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부족한 현실에서 인도 도래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는데.

△비판적인 이들은 허왕후 이야기와 가야불교를 후대 사람들이 소설로 삽입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가야사 전공자가 인도에 가서 아요디아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이는 드물다. 역사학, 고고학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다. 사학자 중에서 중국 보주를 가본 사람이 얼마나 있나? 허왕후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인도지역을 제대로 답사한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허왕후 도래와 가야불교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유물도 부족한 측면이 있다.

△허왕후의 인도 도래나 가야불교에 허구성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증거가 있냐는 것이다. 가야사가 허구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본인 주관에 맞지 않는다고 네거티브한 시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기록에만 의존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 보주에 쌍어문이 얼마나 많은지 보면 그들도 충격을 받을 것이다. 보주 인근에 허왕후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허 씨가 15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모른다. 중국은 과거에도 현재도 소수민족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원·청 등 소수민족 때문에 왕조가 교체돼 이민족에게 통치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허왕후의 인도 도래가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문헌기록이 적은 분야일수록 인접학문을 활용해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 역사학뿐 아니라 언어학, 인류학, 풍속학 하는 사람들이 덤벼들어야 한다.
 
우선 삼국유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는 과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설화나 전설로 치부해) 감성적으로 해석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
 
<삼국유사> 국문번역본이 나온 지 50년 다 되도록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한 글자가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결혼예물 가운데 '경구'가 있다. 기존 번역은 단순히 보석으로 해석하지만, 경구(瓊玖)는 바로 미얀마의 루비와 히말리야의 까만 보석 '블랙 스톤'이다. 이는 인도에서 허왕후가 왔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 한문으로 써 있는 단어를 단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뒷 뜻(문자 이면의 의미)을 살펴야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김해 김 씨 시조인 '알지'는 알타이어 연구에 따르면 왕실을 뜻하는 'Royal(로얄)'과 같은 뜻이다.
 
김수로의 뒷 뜻, 첫째로 태어났다고 수로(首露)라고 하지만 SUR(수르)는 태양이다. 흉노가 숭상하는 '검은 까마귀'와도 일맥상통한다. 발음 그대로 해석하는 비교언어학적 접근도 필요하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도 가야사 복원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가야사 연구가 보다 활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에 대해 강조했지만 임기 중에 단숨에 많은 것들이 나올 수 없다.
 
지방사를 재조명하면 민족 이동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김해 지방의 고대지명 자료집은 인문학적인 기초자료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명과 이름은 민족의 이동과 관계를 암시한다. 처음 미국 뉴욕에 네덜란드인들이 이주해 도시를 건설할 당시에는 본국의 수도 이름을 차용해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지만 이후 영국인들이 본격 진출한 후 새로운 요크를 뜻하는 뉴욕(New-York)으로 변천한 것이 좋은 사례다.
 
한국전통문화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대학이 위치한 부여 지명을 정리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지역 출신 연구자들이 없어 실제 작업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지명과 인명의 유래를 찾고 변천을 살피는 작업은 고전적인 연구방법이지만 유효한 접근방법이다.
 
본격적으로 가야와 인도의 관계를 연구할 학회를 만들어야 한다. 기존 역사학계의 참여가 미온적이라면 재야 사학자들도 동참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저변을 넓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허왕후 도래 및 가야불교의 연구와 복원을 위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역사학계가 허왕후 도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네거티브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40여 년 전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쓸 당시 주제가 중국 고분이었다. 한나라가 전한(前漢)에서 후한(後漢)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마 벽돌기술의 영향을 받아 고분 양식이 변화했다는 주장을 했다. 당시 논문을 심사하는 교수들 가운데 다수는 로마의 벽돌기술이 이역만리 떨어진 한나라로 건너갔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냐며 논문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나 로마 군사가 중국까지 건너와 집성촌을 형성했다는 증거가 발견됐다. 논문에서 제시한 가능성이 실제 사실이었던 것이다.
 
2005년 중국 간쑤(甘肅)성 융창(永昌)현에 유럽 사람처럼 생긴 농민 400여 명이 살고 있음이 확인됐다. 중국학자들은 이들이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왕국 정벌에 나섰다가 도망친 크라수스 로마 집정관 아들 등 로마군단의 후예라고 결론 내렸다. 크라수스 집정관은 기원전 53년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방의 파르티아 왕국 원정에 나섰지만 유인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일부 병사가 탈출한다. 전투에서 로마군단이 실종된 뒤 20년이 지나 중국에 '로마'를 뜻하는 '리찬촌'이라는 마을이 형성됐다. 중국학자들은 리찬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DNA검사를 벌여 이들이 로마군단의 후예임을 확인했다.
 
허왕후 도래와 가야불교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된다면 현실로 입증될 여지가 충분하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다. 올해 봄 김해시가 주최하고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가 주관한 가야사 국제학술회의의 주빈으로 초청 받았지만 척추가 많이 아파서 가지 못했다. 1970, 1980년대 교류하면서 허왕후의 실체와 가야불교에 대해 고민했던 허명철 조은금강병원 이사장, 은하사 대성 큰스님 등 김해지역의 옛 지인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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