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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 집안이지만 곳곳에 영남학파 글씨… 포용하는 교육 공간김해의 문화재 (17) 화산정사(華山精舍)
  • 수정 2017.12.06 12:04
  • 게재 2017.12.06 08:55
  • 호수 350
  • 9면
  • 조나리 기자(nari@gimhaenews.co.kr)
▲ 반룡산 중턱에 자리잡은 화산정사 전경.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550호 지정
반룡산 공원 지나 우거진 숲속 위치

전우 선생 별세 직전에 현판 글씨 받아
‘치치당’,‘염수재’ 등 재실 각각 이름 가져

청통헌에서 술 한 잔 나누며 여름 나기
제대로 된 안내판 없어 관리 아쉬움

 

2007년 8월 4일 영남 기호학파의 마지막 유학자로 불린 이우섭 선생의 장례가 열렸다. 월봉서원 앞에는 평상시 쉽사리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한여름 도포와 갓을 쓴 선비 수백 명을 비롯한 3000명의 조문객이 모였다.
 
악귀를 쫓는 탈꾼이 운구 행렬의 선두에 서고 그 뒤를 200여 개의 만장과 흰 꽃상여가 따랐다. 행렬이 이른 곳은 월봉서원에서 2㎞ 남짓 떨어진 관동동 반룡산 중턱에 위치한 화산정사(華山精舍)였다. 화산정사 뒤편에는 전주 이씨 덕양군파 선조의 묘소가 즐비하다. 이우섭 선생의 장지이기도 하다. 이후 화산정사에서는 선비가 숨졌을 때 초상난 달을 넘겨 치르는 16일장이 이어졌다. 전국 마지막 유림장(儒林葬)이었다.
 
화산정사는 이우선 선생의 유림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공간이다. 화산정사는 월헌 이보림의 조부인 농은공 이경현(1859~1936)이 부친인 통정대부에 대한 효심으로 창건한 곳이다. 이 곳은 조상을 추모하는 공간인 동시에 후손들, 마을 사람들과 강학을 논하는 교육공간으로 활용됐다. 또한 선비들이 반룡산 한 가운데서 자연을 즐기는 풍류의 공간이었다. 화산정사는 유림장 이후 근대 한옥으로서의 가치와 영남의 기호사림 학맥을 보여주는 유학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50호로 지정됐다.
 
화산정사는 우리의 생활권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김해의 '핫플레이스'인 율하카페거리의 입구인 장유3동주민센터의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반룡산공원이 등장한다. 반룡산공원이라는 크게 적혀 있는 바윗돌을 지나 김해목재문화체험장을 스쳐지나면 나무들이 우거진 산 가운데 그림 같은 모습의 고택이 등장한다. 돌계단 옆으로 조성된 화단, 고택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낮은 담장은 작은 성곽을 보는 듯하다. 
 
이례문(以禮門). 화산정사를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처음 만나는 정문이다. '예로써 한다'는 뜻으로 예를 중요시했던 전주 이씨 가문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 화산정사의 서문인 독경문. 독경문의 글씨는 주자, 퇴계, 전우의 글씨로 쓰여져 있다.

이례문을 지나 화산정사 내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서문인 독경문(篤敬門)이다. <논어>의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말과 행실이 착실하며 공손하다)하면 만맥의 나라라도 행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경문의 뜻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독경문의 글씨 자체다. 독경문의 글씨는 중국 송대의 유학자인 주자, 퇴계 이황, 간재 전우의 글씨를 하나씩 딴 것이다. 삼선생(三先生)의 글씨가 나란히 배열된 독경문만 바라봐도 이 가문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학맥을 이어왔는지 짐작해볼만 하다.
 
이례문이든 독경문이든 화산정사 내부로 들어서면 비로소 눈앞에 화산정사 재실이 나타난다.  가문에서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수려한 글씨체로 쓰인 화산정사의 현판이다. 이보림의 손자인 부산대 한문학과 이준규 교수는 "할아버지(이보림)가 1921년 간재 전우 선생에게서 직접 받아온 것이다. 할아버지 이보림은 17세 때 전북 부안 계화도로 전우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는데 그때 계화도에서 받은 글씨라고 한다. 특히 이 글씨는 전우가 별세하기 한 해 전에 썼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 이준규 교수가 조상 묘소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

화산정사는 가로 네 칸으로 크지 않은 재실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하나 깊은 의미를 가진 글씨가 가득 걸려있다. 재실 기둥에는 독경문과 마찬가지로 유학자들의 글씨를 집자해서 적은 글씨가 많다. 중앙 기둥에는 퇴계 이황, 동편 기둥에는 우암 송시열, 좌측 기둥은 간재 전우의 글씨가 배치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학맥을 이어받은 기호학파인 이보림의 집안에 영남학파인 퇴계 이황의 글씨가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퇴계의 글씨가 있는 것을 기호학파, 노론 집안들에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남학파가 주를 이루는 경상도에서 다른 학파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 이황의 본받을만한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재실 안에는 월헌 이보림이 간재 전우 선생 아래에서 함께 학문을 익히고, 가르침을 받은 석농 서진영, 혁재 오진영의 기문, 농은공의 치치당기 등이 걸려 있다. 서진영은 화산정사 기문에서 "농은 이경현 공은 교남(영남)에서 유자로 은거하며 화(華)에 뜻을 두신 분이다. 금릉의 화산 선영에 재실 하나를 세우고, 곧 문미를 걸어 그 뜻을 붙이고는, 수천 권의 서책을 쌓고 멀거나 가까운 곳의 명사숙유들과 그 자신들을 초빙하여 함께 거처하며 존양의 도를 강론하니, 이는 세속에서 그저 겉으로만 보기 좋게 하는 자들과 같은 급으로 논할 수 없이 분명하다"며 화산정사를 건립한 이경현을 높이고 있다.
 
가로 네 칸인 재실에는 화산재(華山齋), 치치당(致致堂), 염수재(念修齋), 낙요재(樂要齋) 등 각각의 이름을 갖고 있다. 치치당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을, 염수재는 조상을 생각한다는 뜻을, 낙요재는 책을 읽는 것이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이 되고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천하의 지극한 중요함이 된다는 뜻을 가진다.
 
화산정사 뒤편의 문을 열고 재실에 앉으면 전주이씨 가문의 선산이 드러난다. 과연 이 재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추모의 장소인 것을 가늠하게 한다.
 

▲ 화산정사 재실 내부 모습.

화산정사에서 또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할 곳은 맑은 빛이 비치는 마루 혹은 처마, 집이라는 뜻을 담은 청통헌(淸通軒)이다. 화산정사 밖에서 본 이례문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화산정사 안에서 이례문 쪽을 바라보면 문 좌측에 자그마한 계단이 보인다. 4~5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다락방처럼 펼쳐진 공간이 나타난다.
 
이준규 교수는 "화산정사는 월봉서당에서 공부를 하던 조상과 선비들이 여름철 무더위를 피해 왔던 여름 별장 같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름이 되면 이 청통헌에 올라 술 한 잔과 함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과거와는 그 모습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반룡산 중턱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면, 과거 이 곳에서 자연을 즐기던 조상들의 모습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청통헌에 앉으면 반룡산 아래 율하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없었을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들이 반룡산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서진영은 청통헌 기문에서 청통헌을 “구름이 만 리 길을 휩쓸고 달이 천길 강에 비춰, 사람으로 하여금 심신을 모두 벗어나게 하여, 작은 거동으로 천지사방을 어루만질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10년 전 우리나라 마지막 유학자의 장례로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가까이에 있는 보물인 화산정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실정이다. 이 교수는 "반룡산에서 화산정사로 향하는 길을 나타내는 제대로 된 안내판이 없다. 화산정사 관리도 다 가문에서 하고 있다. 시 지원이 늘어나 많은 시민들이 고장의 아름다운 문화재를 알아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화산정사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50호, 관동로 27번길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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