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면 흔히 먹는 과일이 귤이다. 다른 과일에 비해 귤은 껍질을 손으로 까서 바로 먹을 수 있으니 참 편하다. 중학교 시절 한 친구 녀석이 귤껍질을 못 깐다 해서 내가 껍질을 까서 준적이 있는데  '참으로 희한한 놈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귤 하면 육적의 회귤고사(懷橘故事)가 떠오른다. 중국 오나라 육적은 여섯 살 때 원술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원술이 귤을 내어 대접하였다. 육적은 그 자리에서 귤 세 개를 품 안에 숨겼는데, 돌아갈 때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원술이 왜 귤을 숨겼느냐고 묻자, 그는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어머니께 드리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였다. 맛도 있는 것이지만 당시 워낙 귀한 것이라 어머니가 생각났던 것이다. 효도를 말할 때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고사이다. 
 
우리에게도 귤에 대한 역사는 깊다. 백제시대부터 탐라국에서 귤을 공물(貢物)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도 대마도, 제주도의 귤이 개성으로 올라왔다. 고려말기 이승인은 팔관회에 참석하여 '술을 귤배에 부어 마시니 그 향기가 자리에 가득하다'고 노래했다. 귤배는 귤을 반으로 가른 껍질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이렇게 귤껍질에 술을 부어 먹어 본 적이 있는데 향과 운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가에 의해 제주의 귤이 본격적으로 관리되었다. 관리는 귤나무의 수를 일일이 기록하고 열매가 맺을 만하면 열매숫자를 확인하고 만약 그 집 주인이 귤을 따면 절도죄로 다스렸다. 험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제주도의 귤나무를 순천 등 바닷가 마을에 수백그루 옮겨 심어 여러 번 실패한 흔적도 보인다. 세종 때는 강화도에 높이가 10척이 넘는 나무로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온돌까지 만들어 귤을 재배하려 하였지만 성공치 못하였다. 귤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8도의 여러 진상품 중에서도 특별히 제주에서 귤이 진상품으로 올라오면,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성균관과 서울의 4개 학교의 유생들에게 특별과거를 보이고 귤을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황감제(黃柑製)'이다. '황감(黃柑)'은 노란 감귤이란 뜻인데 명종 때 시작돼 19세기 말까지 30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당시 귤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점잖은 선비들도 귤을 더 받겠다고 분탕질이 상당했다는 기록들이 많다. 급기야 정조 때에는 난동사건으로 지금의 국립대 총장이 파면되고 난동이 심한 유생은 과거 응시 제한 조치까지 받았다하니, 한자리에서 서너개씩 먹어 치우는 지금의 그런 귤이 아니었나 보다.
 
귤의 과육은 다 먹어 버리고 껍질만 남아서 일까. 동의보감에는 귤피(진피, 陳皮)라 하여 귤껍질만을 약재로 쓴다. 3년 이상 오래 묵힌 것을 상품으로 친다. 
 
하기야 대부분의 곡식, 과일들이 그렇듯이 껍질 부분에 유효성분이 많고 알맹이는 '당분 덩어리'라 해도 좋다. 귤하면 먼저 떠오르는 비타민 C도 껍질인 진피에 열매보다 4배나 많다. 식이섬유인 펙틴, 콜레스테롤 성분을 낮춰주는 테라빈유, 항암작용을 하는 베타카로틴과 과일 중 유일하게 헤스페리딘이라는 비타민P도 껍질인 진피에 함유돼 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귤껍질의 효능은 '가슴에 기(氣)가 뭉친 것을 치료하며 음식 맛을 나게 한다. 또한 기운이 위로 치미는 것과 기침하는 것을 낫게 하고, 구역을 멎게 하며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한다' 이다. 한마디로 소화기를 따뜻하게 도와주고 순환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귤의 껍질은 포장지에 유기농, 무농약이라 써 있어도 껍질을 끓여 먹기가 선뜻 내키지는 않을 것이다. 약효가 집중되어 있는 껍질만큼은 아니지만 귤의 알맹이에도 그 만큼의 작용은 있으니 과육으로 즐겨먹자.
 
우리가 매일 먹는 고추, 배추 등에도 비타민C가 많으므로 하루 필요한 비타민C는 중간 크기의 귤 2개면 충분하다. 만약 당뇨가 있다면 한 개 정도면 좋겠고, 위산이 많아 속쓰림이 있다든지 역류성 인후염으로 기침이 있다면 섭취에 주의가 필요하다.

김해뉴스 /조병제 한의학·식품영양학 박사 부산 체담한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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