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와 청년 실업, 각종 사건 사고 등 연일 우울한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일상의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다.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전해줄 따뜻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 부산 부경중·보건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류수열(왼쪽)·박영숙 부부.

 
 부산 부경중·보건고교서 공부
 어르신 중·고교 학력 인증 과정
“학교 생활은 천국, 아픔도 잊어”


 
"굿모닝(좋은 아침입니다.)"

지난달 24일 부산시 사하구 장림2동 부경중·보건고등학교. 힘찬 아침 인사가 중학교 2학년 4반 교실 안에 울려 퍼진다. 학생들은 영어 담당 서정환 교사가 나눠준 학습지를 챙겨 들고 찬찬히 학습지에 적힌 문제집을 읽는다.
 
"학습지 다 받으셨죠? 자,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입니다. 꼬부랑글자를 보니 영어네요. 네 번만 읽어보면 여러분이 전에 배웠던 영어 단어라는 걸 알 겁니다."
 
서 교사의 재밌는 설명에 머리가 하얗게 센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웃음꽃을 피운다. 부경중·보건고등학교는 배움의 시기를 놓친 만 18세 이상 성인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는 학력인증 성인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1년에 3학기 과정을 운영하기 때문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각각 2년 만에 졸업장을 받는다. 성인반 중학생은 313명, 고등학생은 298명이 재학 중이다. 이 중 중학생 6명과 고등학생 5명은 지난해와 지난 2월 김해도서관과 김해내동배움나루 문해교실을 졸업한 김해시민이다. 이들은 매일 경전철과 통학버스를 타고 오전 9시 20분까지 등교한다.
 
류수열(79·삼계동) 씨는 2학년 4반의 유일한 남학생이다. 그는 직접 운전을 해서 아내 박영숙(75) 씨와 매일 학교를 찾는다. 이들 부부는 지난 2월 김해내동초등학교 내동배움나루 문해교실을 졸업한 뒤 부경중·보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70대 노인들이 '지금 공부해서 어디에 써먹냐?'고 많이 물어봅니다.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우고도 뒤돌아서면 금방 잊어요. 하지만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픈 것도 모르고 삽니다.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어딜 가서 친구를 만들고 공부하겠어요?" 류 씨가 껄껄 웃는다. 류 씨와 박 씨는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류 씨는 김해 오일장에서 그릇 장사를 했고, 박 씨는 동상동전통시장에서 40년 넘게 제수 음식을 만들어 팔며 살아왔다.
 
1930~40년대는 공부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다. 박 씨 부모님도 마찬 가지었다. 박 씨는 "6형제 중 넷째 딸이에요. 아버지가 자식을 공부시킬 생각이 별로 없으셨죠. 아홉 살 때 초등학교를 들어갔는데 늦은 나이에 학교를 입학하다보니 주위 친구들을 따라가기 힘들었죠. 자존심이 상해서 학교를 며칠 다니지도 않고 그만뒀어요"라고 말했다.
 
류 씨 역시 초등학교에 다닐 기회를 놓쳤다. "일본에서 태어났어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여덟 살에 한국에 와 부모 고향인 창녕군에 살았어요. 한국어는 하나도 몰랐죠. 초등학교를 입학했더니 일본어 밖에 할 줄 모른다고 친구들이 놀려댔죠.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살다 보니 어느새 노인이 됐더군요." 류 씨는 말했다.
 
류 씨 부부는 시장에서 열심히 장사하며 굶지 않고 쌀밥을 먹고 살 정도로 풍족한 생활환경이 된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공부에 대한 열망이 남아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다니기 시작한 학교생활은 삶의 새로운 활력이 됐다.
 
박 씨는 "학교생활은 천국이었어요. 한글을 읽을 줄도 몰랐는데 상가 간판을 보고 뜻을 알게 된 저 자신이 너무 신기했죠. 학교 다니기 전에는 몸이 좋지 않아 매일 병원으로 출근했어요. 지금은 공부한다고 아플 시간도 없지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류 씨는 "학교 다니면 절로 건강해져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힘이 닿는 한 공부할 생각이에요. 주변 친구들에게 '조금만 용기를 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들 시작도 전에 공부하길 포기하지요. 제가 배운 것을 주변에 나누면서 여생을 살고 싶어요. 공부할 수 있는 지금 참 행복합니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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