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박산 정상에서 바라본 임호산. 전설에 따르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의 산이라 호랑이 입 부분에 절을 세워 그 기운을 눌렀다고 전해진다. 그 절이 흥부암이다.  사진/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김해에는 가락국의 전설을 간직한 산들이 많습니다. 그 만큼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오며 가락국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겠지요. '쇠의 바다, 김해' 그 김해의 산을 최원준 시인과 함께 걸어봅니다. 시인의 서정 어린 감수성으로 등산(登山)이 아닌, 유산(遊山)으로서의 참맛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시작부터 악산(惡山)의 기세를 부리는 것인가? 경사가 가파르다. 버티고 서 있는 기운이 만만찮다. 마침 전날의 많은 비로 들머리 등산로가 군데군데 물길을 내고 있다. 그 사이로 쨍쨍한 매미소리가 끼어든다.
 
이번 산행은 내외동 흥부암 들머리로 하여 임호산(林虎山)과 함박산을 이어서 오른 뒤 한신아파트로 내려오는 코스. 산행 들머리는 김해건축자재백화점 옆길에서 시작된다. 흥부암 이정표와 임호산, 함박산 이정표가 서 있어 들머리 찾는 불편함은 없을 것 같다.
 

▲ 흥부암 부근의 노목과 이끼. 세월의 더께를 말해주는 듯하다.
산행 초입부터 채전밭 푸른 소채들이 탐스럽게 반긴다. 기분 좋은 산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계속되는 경사에 땀이 슬슬 날 때쯤 숨을 고르며 발치의 풍경을 가늠해 본다. 멀리 분성산과 남산이 보이고, 그 뒤로 신어산이 떡 버티고 섰다. 김해벌을 지키며 가락문화와 그 정신을 보듬어 왔던 산. 이제 머지않아 만나 볼 그들이다.
 
본격적인 숲으로 들어선다. 도심의 작은 산 치고는 숲도 깊고 산의 기운도 중후하다. 길가로 고사리도 한창이고 담쟁이덩굴도 늙은 소나무를 감고 쉼 없이 오른다. 산길 곳곳에 바위가 자리 잡아 산의 무게를 더해주는 듯하다.
 
강렬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잠시 눈이 멀 지경이다. 그럼에도 굴참나무, 상수리나무들은 짙푸름을 더하고 더불어 칡꽃이 진보랏빛으로 사람 마음을 붙잡는다. 꽃을 따서 향을 맡으니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난다. 씹어보니 역시 달콤하다.
 
느릿하게 걷는 사이 멀리 독경소리가 들린다. 흥부암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흥부암은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함께 가락국으로 건너온 오빠 장유화상이 창건했다.
 
원래 임호산은 나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악산(惡山)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의 산이라 호랑이 입 부분에 절을 세워 그 기운을 눌렀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백성이 편해졌다 하여 안민산(安民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흥부암 밑에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이 하나 있다. 성도굴이다. 유민공주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의 부마인 황세장군은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여의낭자와 정혼한 사이였는데, 왕이 자신의 딸인 유민공주와 연을 맺어주자 이에 여의낭자가 병을 앓다가 숨진다. 이어 황세장군마저 세상을 떠나자 유민공주는 궁궐을 버리고 출가, 이 성도굴에서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을 유민산(流民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가까이서 보니 돌탑도 하나 서 있고 자그마한 불상과 초 한 자루가 놓여있다. 기도의 흔적이 뚜렷하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식구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치성을 드렸을 터이다.
 
동굴 위에서 바위를 타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오랜 세월 그 물방울은 자연을 관통하며 인간의 마음에까지 닿았을 것이다. 새삼스레 삼라만상이 바위를 뚫은 물방울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 경건해진다.
 
흥부암 돌담길로 접어든다. 누가 돌을 쌓았는지 알 순 없지만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쌓았을 공덕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돌담 틈 사이사이에 모신 동자승의 모습들이 편안하다. 부처의 집으로 오르는 이들을 인도하는 듯하다.
 
일제히 매미들이 운다. 귀를 먹먹하게 가득 채운다. 흥부암 오르는 계단 앞에서 늙은 노목 하나 길손을 맞이한다. 이윽고 흥부암 경내. 대웅전 뒤로 절벽이 떡 버티고 섰다.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다. 40여m에 달하는 절벽은 산문에 든 자들에게 서슬 퍼렇게 호령호령 해댄다.
 
대웅전에서 보니 멀리 김해 시가지가 눈 아래로 들어온다. 봉황대, 김해패총 등을 잇는 낮은 구릉들, 신시가지의 아파트촌과 시외버스터미널, 김해평야를 가로지르는 경전철…. 김해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며 조화롭다.
 
다시 산을 오른다. 절벽 바위를 뚫고 참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자연은 이렇게 기적처럼 생성되고, 그 생성을 업고 삼라(森羅)가 함께 가고 함께 소멸되는 것이리라.
 
산길이 마치 뱀 똬리를 틀듯 산을 휘감았다. 관목들이 무릎을 치며 가는 길을 붙잡는다. 갑작스런 급경사와 맞닥뜨려져 숨이 턱턱 막힌다. 작은 산이라 얕볼 일이 아니다. 아무려면 산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갔을까 싶기도 하다. 비 온 뒤라 길도 미끄럽고 경사도 더욱 사나워진다. 일행들의 말꼬리는 어느새 끊어지고 거친 숨소리만 생생하다.
 
갑자기 급경사가 끝이 났다. 임호정(林虎亭)이 눈에 들어온다. 바야흐로 임호산 정상(178.4m)에 도착한 것이다. 깊은 숨을 두어 번 고르는데,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갑자기 나뭇잎들이 서걱이며 술렁이기 시작한다. 곧 장대비가 쏟아 붇는다. 사통팔달의 바람이 임호산 정상으로 달려오고 산을 에워싼 김해의 하늘은 먹구름의 용틀임으로 산통을 겪고 있다.
 
그 와중에도 임호정 발아래로 펼쳐진 김해평야는 싱그러움의 절정을 만끽하고 있다. 평야 사이로 서낙동강이 여유롭게 흐르고 그 뒤로 김해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오봉산이 보이고, 해반천도 눈에 들어온다. 이 모두가 한 때 역동의 바다였던 시절이 있었다. 철의 제국을 일으킨 '쇠의 바다'. 김해의 번성을 가져다 준 곳이다.
 
천둥 번개가 크게 여러 번 몰아친다. 빗방울은 더욱 거칠어지고 너른 평야는 몰려온 안개로 커튼 치듯 서서히 가려진다. 자연의 조화 속은 인간의 한 치의 속으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음이다.
 
비가 조금 잦아들자 임호산 정상석 앞에 선다. 정상석이 작고 소박하다. 30㎝쯤 되는 강돌에다가 산 이름을 새겼다. 사방을 둘러본다. 너르고 넉넉한 김해평야, 그 사이로 게으르게 흐르는 강줄기들, 병풍같이 둘러서 있는 신어산….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상수리나무들이 하릴없이 정상의 바람을 우직하게 맞고 서 있는 것이다.
 
임호산 정상에서 내려 함박산으로 향한다. 잠깐의 능선이 부드럽다. 능선을 끼고 숲 사이로 편안한 걸음을 걷는다. 잠시 쉬어 가라고 평상도 준비해 두었다. 모처럼 마음이 푸근해질 찰나에 천둥소리가 크게 들린다. 김해평야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울음 같다.
 
능선도 잠시, 급경사의 하산길이 여간 미끄럽지 않다. 조심해서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오르막길. 능선을 오르내리길 두어 번 반복한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장정 몇의 숨소리만 들릴 뿐, 적요하기만 한 산행이다. 가끔 곤줄박이 한 마리가 일행을 뒤따르듯 머리 위서 지저귈 뿐이다.
 
▲ 임호산 정상과 정상석.

함박산 안부. 잠시 숨을 고르며 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멀리 임호산이 삿갓을 쓴 채 버티고 있고, 그 사이로 왔던 길들이 끊어질 듯 아스라이 이어져 있다. 우리의 인생길도 이런 것일까? 화려했던 인생의 정상에서 내려왔을 때, 눈부시게 걸어왔던 황금기의 추억은 얼마나 아련하고 여운이 남을까?
 
본격적으로 함박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길은 편하다. 데크 옆으로 졸참나무들이 바야흐로 도토리 열매를 맺고 있다. 나무 사이로 싱그러운 청미래(망개)덩굴은 제 손을 이리저리 넌출대며 반가운 인사 중이다.
 
함박산 정상(166m)에 오른다. 한 번 산행에 두 산의 정상을 밟는 것이다. 그만큼 정상에서의 성취감은 배이겠다. 원래 함박산은 조선시대 때 폭우로 전국의 집과 산이 물에 잠겼지만, 이 산 봉우리만은 함박꽃 크기만큼 잠기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 함박산 하산길에 만난 작은 폭포. 비가 많이 온 때문에 앙증맞은 모양으로 갑자기 만들어졌다.
사방을 둘러보니 김해 시가지와 김해평야가 에둘러 펼쳐진다. 시가지를 조망하면서 문득 '도심에 이렇게 재미있는 산행길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낮지만 골이 깊어 활달하고, 작지만 능선의 어르고 달래는 맛이 조화로운 산. 가락국의 전설이 산을 메우고, 김해의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곳. 김해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일거에 하나가 되는 곳이 바로 임호산~함박산인 것 같다.
 
하산하는 길. 계속해서 바위들은 서 있고, 바위 틈새로 달개비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다. 비 온 뒤라 하산길 군데군데가 도랑길이 되었다. 계곡물소리도 맑고 시원하다. 앙증맞게 폭포를 이루는 곳도 있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 이윽고 속세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날머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국적인 건물에 카페 분위기가 나는 한신자연유치원이 보인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재재거림이 사람을 기껍게 한다. 물 한 잔 얻어 마신다. 천하의 감로수가 이 물 맛에 비할까? 땀을 닦으며 내려오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고개 들어 돌아보니 사람은 간 데 없고 자귀꽃만 한창 자지러질 뿐이다. 또 다시 햇살은 따갑도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Tip.하산길 맛집

목 타는 하산객들 정신이 번쩍 드는 시원한 냉면 국물

한신아파트로 하산하여 중앙병원으로 방향을 틀면 중앙병원 옆에 '조박사 냉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냉면 삼매경에 빠져 있다. 메뉴를 보니 물냉면, 비빔냉면, 회냉면, 섞기냉면, 개성왕만두, 왕갈비탕 등이 있다.
 
하산 끝이라 물냉면을 시킨다. 큰 스테인리스 사발에 냉면이 정갈하다. 사발에 김이 서려 시원한 느낌을 준다. 냉면 위에 오이채, 얼갈이배추김치, 채썬 배, 삶은 달걀 반 알이 고명으로 들어가고, 깨가 동동 떠있는 게 맛깔스럽다.
 
우선 사발을 들고 육수를 맛본다. 동치미 육수다. 이가 시릴 정도의 찬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청량감을 더해준다. 첫 맛은 담백하고 시원하다. 그러면서도 뒤 끝은 감칠맛을 준다.
 
면을 푼다. 면이 아주 가늘다. 고기를 얹어 한 입 크게 문다. 가는 면들이 입 안에서 쫄깃거리며 즐거운 아우성이다. 편육 육즙이 면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구수하고 담백해진다. 참 조화로운 맛이다.
 
더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이가 시리다. 산을 탄 몸이 일시에 서늘하게 식는다. 얼갈이배추김치의 아삭거리는 식감도 괜찮고 간혹 씹히는 채 썬 배의 달콤함도 나쁘지 않다. 물, 비빔냉면은 각 7천원(소) 9천원(대)이고 회·섞기냉면은 8천원이다. (055)322-1066


>>최원준 시인은
1987년 문예지 '지평'으로 등단하여 2002년 '심상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늘도 헛도는 카세트테이프', '금빛 미르나무숲', '北邙북망' 등이 있고 '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 '낙동강, 물길 따라 역사 따라', '부산, 장소를 꿈꾸다' 등의 공저가 있다. 부산일보에 4년 간 연재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장 따라 골목 따라', '작품 따라 맛 따라' 등 다양한 매체에 집필을 하며,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소통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문화공간 '守怡齋수이재'를 운영하고 있으며, (사)최계락문학상재단 사무처장, '골목과 사람'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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