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년 로마서 최초 기록된 전염병
1차 세계대전 '에스파냐 독감' 등
역사를 조정한 질병에 관한 기록



2015년 5월 20일. 국내에서 메르스(MERS)라는, 그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질병에 걸린 환자가 발생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의 영어 머리글자를 딴 이 병은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의 감염에 의한 바이러스 질환으로 2012년 4월부터 중동 지역에서 주로 감염자가 발생한 급성 호흡기 감염병. 메르스는 두 달여간 확진자 186명에 사망자 39명, 격리 해제자 1만 6752명을 기록하며 한국 사회에 엄청난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낳게 했다.
 
사태 악화에는 박근혜 정부의 무능한 대처가 '한몫' 단단히 했다. 정확한 지침과 방향을 제시해 국민 안전을 위한 정책을 세우기는커녕 황당무계한 지침을 내놔 '몰매'를 맞았다. 보건복지부는 첫 확진 환자가 나온 직후 발표한 지침을 통해 '낙타와 밀접한 접촉을 피하세요' '멸균되지 않은 낙타유 또는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의 섭취를 피하세요'라고 권고했다. 낙타를 볼 수 없는 현실을 도외시한 보건당국의 지침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출근할 때 당분간 낙타는 타지 말아야겠다' '오늘 통학낙타 못 타고 버스 타는 바람에 지각할 뻔' '휴, 정부의 조치가 아니었으면 낙타유를 마실 뻔했지 뭐야!' 등의 조롱이 쏟아졌다.
 
질병은 인류 역사 이전부터, 아니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있었다. 질병이란 생명체가 외부 환경에 반응하는 생명 현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사는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난 인류가 질병과 끊임없이 추격전을 벌이는 과정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감염과 내성(耐性)의 변증법적 역사'가 시작됐다. <판데믹 히스토리>는 인류 역사를 끊임없이 조정해 온 질병에 관한 문명사적 기록이다. 의사(연세대 의대 교수)로는 드물게 '대중적 글쓰기'에 힘써 온 저자는 다양한 역사자료 연구에 임상체험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문명사를 해부해 '질병의 인문학'을 펼쳐 보인다.
 
판데믹(Pandemic)은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WHO(세계보건기구)의 전염병 경보단계 중 최고 위험 등급에 해당된다. 질병은 개인적이거나 생물적인 것이지만, 이 책은 문명사와 해당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역병(疫病)을 주로 다루고 있다. 판데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5년 로마에서 발견된다. 로마의 5현제(賢帝)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161~180년)과 겹치는 이 무렵 창궐한 페스트로 로마 시민의 4분의 1~3분의 1이 사망했다. 몇 해가 지난 189년에도 역병이 로마를 강타해 '하루 2000명 이상'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질병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세계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인류가 나무 위 생활을 청산하고 초원에 내려와 살게 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인류를 초원으로 '내쫓은' 것이 세균이라는 사실. 고온다습한 열대우림에서 기생하던 세균과 기생동물 때문에 나무 위에 거주하던 원시 인류는 거의 평생 세균과 기생충 질환으로 고통받았고 이 때문에 생존율도 매우 낮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책은 문명사에 큰 영향을 끼친 질병의 역사를 추적해 간다. 6세기 중반 당시 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3000만~4000만 명에 피해를 입혀 동로마제국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종교개혁의 진로를 논의했던 1592년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의 만남이 당시 유행하던 '영국 발한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개신교의 대표적인 두 교파인 루터파와 칼뱅파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질병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쟁은 작게는 집단과 집단, 크게는 문명과 문명이 부딪치는 사건이다. 이미 토착화한 질병이 다른 문명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16세기 초 에스파냐 군대와 함께 침입한 천연두로 인해 아스테카 문명이 몰락한 것이나 십자군 전쟁(1096~1272년) 시기 대유행한 나병(한센병)과 14세기 몽골군의 유럽 공략 시기에 발생해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질병'이 된 흑사병(黑死病),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자의 약 3배에 달하는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스파냐 독감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이 질병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등장한다. 수용 능력을 훨씬 넘는 인구가 갑자기 도시로 몰리면서 위생상태가 나쁜 지역에서는 오염된 물과 공기, 음식물 등으로 전염병이 빈발했고, 좁고 누더기밖에 없는 추운 환경에서는 이나 벼룩 등이 질병을 일으켰다. 콜레라와 장티푸스, 발진티푸스와 천연두 등이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산업혁명 시대 빈민굴에서 발생했다. 그 결과 1840년 영국 리버풀에서 실시한 한 평균수명 조사에 따르면 상류계급은 평균 35세, 중간계급 사업가나 직장이 좋은 수공업자는 평균 32세인 반면 기능공과 막노동자, 서비스 노동자 등 하층민의 평균수명은 15세에 불과했다.
 
유럽은 이후 노동자 계급의 투쟁으로 상황이 개선됐지만, 식민지 쟁탈전이 본격화되면서 산업혁명 초기 유럽에서 나타났던 비인간적인 환경은 식민지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됐다. 저자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개발도상국의 많은 미성년 노동자가 사람들의 허영을 만족시킬 화려한 '명품'을 제작하는 일에 헐값으로 혹사당하고 있다"며 "오늘날의 인간존중이라는 가치와 윤리 의식이 정립되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하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산일보 /박진홍 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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