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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 그 슬픈 가야의 사랑 이야기업그레이드 김해 관광 (1) 봉황대 유적
  • 수정 2018.01.17 09:52
  • 게재 2018.01.17 09:45
  • 호수 356
  • 13면
  • 정상섭 선임기자(verst@gimhaenews.co.kr)

김해는 이천년 전 가야 숨결이 살아 숨쉬는 문화와 역사의 도시이다. 수로왕과 허왕후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빚어낸 세기의 러브 스토리가 곳곳에 흘러내리는 이야기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해는 관광의 불모지이기도 하다. 같은 역사도시인 경주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이다. '가야 왕도' 김해는 홍보 슬로건에 그칠 뿐, 짜임새 있는 관광정책이나 투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김해 관광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 그 시작은 이리저리 흩어진 이야기와 유적지들을 다시 보고, 느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김해뉴스가 지면 개편과 함께 선보이는 '업그레이드 김해 관광'이 그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 해반천에서 바라본 봉황대 전경. 가야 포구 너머로 황세바위와 봉황대 정상이 보인다.  정상섭 선임기자

 

황세바위, 하늘문… 설화 흔적 곳곳에
가야·신라 충돌 등 역사적 사실 배경
홀로 튀는 ‘유공 회원비’ 저절로 눈살

회현리 패총 가야문화 우월성 입증
‘가야 포구’ 발굴로 해상왕국 밝혀져

 

한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한 소녀가 멀리 맞은 편에서 그를 바라본다. 탯속에서부터 이어진 둘의 인연, 서로를 가슴에 품고도 맺어지지 못했던 비련.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천오백여 년을 지나 김해 봉황대에서 가락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새롭게 태어나 연인들을 불러 모은다. 연인들은 햇볕 반짝이는 대나무 숲길을 함께 걸으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봉황대(鳳凰臺)는 김해 시가지 중앙의 해반천 옆에 자리잡은 작은 구릉이다. 구릉은 남북으로 뻗은 봉황대와 그 남쪽 주택가에서 동서 방향으로 꺽어진 회현리 패총(조개더미), 서쪽의 가야 포구 등으로 이뤄졌다. 당초 회현리 패총만 국가사적 제2호로 지정돼 있었으나 2001년 이 곳들을  합쳐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됐다.
 
 

■역사적 사실과 상상 버무려져

▲ 가야 시대 애틋한 사랑 이야기의 주 무대인 황세바위. 옆의 대나무 숲과 호젓한 오솔길이 운치를 더해준다.

봉황대에는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의 아름답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곳곳에 스며있다. 봉황대 구릉 위쪽으로 오르면 오른쪽에 대나무 숲이, 왼쪽에 큼직한 바위군이 나타난다. 바로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의 사랑 스토리가 담겨있는 황세바위다. 바람이 대나무 가지를 일렁일 때마다 가야 시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다. 정상 부근에는 출여의 낭자가 죽은 뒤 혼이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하늘문이 있다. 두 사람이 앉아 놀았던 여의좌, 여의 낭자가 책을 읽던 독서대 등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 이야기의 풍성함을 더해준다.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 설화는 비극적인 로맨스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가야를 둘러싼 신라와의 충돌, 긴박하게 펼쳐지던 국제정세, 권력의 부침과 그에 따라서 변하는 인간관계 등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인문적 상상력을 갖추고 있다. 금관가야는 이로부터 불과 50여년 후인 562년, 겸지왕의 뒤를 이은 10대 구형왕 때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삼국유사에는 겸지왕의 부인이 '각간 출충(出忠)의 딸 숙'이라고 기록돼 있어 출 정승 이야기가 일정부분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지러운 비석들 정돈돼야
 
황세 바위를 지나 계단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봉황대 정상이다. 이 곳은 동쪽으로 김해 시가지를 거쳐 분산산성을, 서쪽으로는 임호산을 바라볼 수 있어 가슴이 저절로 트이는 느낌이다. 그러나 정상 주변을 둘러보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어지럽게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비석들 때문이다. 불과 오백 걸음 이내에 직접 확인한 것만 12개이니 실제 그 수가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비석들 또한 30㎝ 내외로 초라하고 절반은 땅에 파묻혀 있어 없으니만 못하다. 비석들 중에는 호현 구진사 회연석(진사 9명의 잔치 기념), 섬섬대(섬섬과 해섬이 가야금 공부한 곳) 등 봉황대와 관계없는 것들도 끼여 있다. 그 가운데서도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은 출여의 낭자의 사당인 여의각 왼쪽에 세워져 있는 '유공 회원비'이다. 유독 이 비석만 검은 오석에 2m 높이로 위압적인 데다 앞뒤로 사당 건립에 희사한 당시 김해군수, 경찰서장 등의 이름과 금액이 빼곡이 새겨져 있어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이다. 국가사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지러운 비석들을 정리해 한 곳에 모으고, 유공회원비 또한 철거해야 할 것이다.



■회현리 패총과 가야 포구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오솔길을 지나 봉황대 남쪽 기슭으로 접어든다. 넓은 잔디밭 가운데 회현리 패총 전시관이 소박하게 자리잡아 방문객을 맞는다. 안내판에 유물 사진과 설명이 적혀있고, 패총의 단면을 잘라 유리를 통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곳이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진 기념비적 장소이다.
 
회현리 패총은 1907년 일본인 고고학자 이마니시 류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역사 연구를 통해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노력했던 인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까지 변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의 사랑 이야기를 형상화한 조각이 세워진 봉황대 남측 입구. 뒤에 보이는 건물이 회현리 패총 전시관이다.

 
발굴 결과 조개무지에서는 나중에 '김해식 토기'로 이름 붙여진 회청색 경질 토기와 화천(貨泉)이라는 중국 신나라 시대 동전,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탄화미)이 출토됐다. 특히 조개더미 아래의 문화층에서 나온 세형동검은 우리 청동기문화의 표식 유물로 흔히 한국형 동검이라 불린다. 기원전 4세기 경 한반도에서 발생해 일본으로 전해진 양식이다. 결국 회현리 패총은 일본의 우월성 대신 가야문화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유물로 차 있었던 셈이다.
 
봉황대에 묻힌 유적들도 긴 잠을 털고 깨어났다. 부산대 박물관이 1990년대 두 차례에 걸쳐 봉황대 전역을 조사한 결과 대규모 생활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쪽 기슭에서는 고상(高床 ) 가옥의 흔적이 발굴됐다. 서편 저지대에는 가야시대의 항구 시설과 배, 즉 가야 포구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가야는 도성 바로 앞까지 배가 드나드는 해상왕국이었던 것이다.

김해뉴스 /정상섭 선임기자 ve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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