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오광대의 노름꾼 마당. 도둑질과 같은 반사회적 행위엔 엄격하면서 도박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당시 정서가 엿보인다.

 

김해오광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37호


하급관리로 일하던 아전들이 주역
밑바닥 민심을 달래는 소통 공간으로

민초들 애환 담고 있는 마당놀이
일제강점기, 민족혼 담긴 행사 금지

현장 누비는 작업 끝에 문화재 지정
‘찾아가는 공연’ 등으로 저변 확대



김해오광대는 김해 지역 대표적인 포구였던 가락면 죽림(현 부산 강서구 가락동)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온 탈춤 마당 놀이다. 정확한 발생 연도는 알 길이 없지만 19세기 중반 이후에 가장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 특권을 누리던 양반들의 횡포와 이중성을 폭로하는 '마당놀이'로 자리를 잡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당시 사회적 특권층으로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던 양반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김해오광대가 주로 관아 마당에서 펼쳐졌다는 점이다. 공연 마당에 탈을 쓰고 등장하는 배우들도 하급관리로 일하던 아전들이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 승려와 상좌를 내세워 당시 타락했던 불교의 실상을 고발하는 중마당.

 
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 연구소장은 "조선 후기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는 않는 등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는 과정에서 양반과 백성 등 양대 계급으로부터 부정부패의 주범으로 매도돼 설자리를 잃어가던 중간층 아전들이 하급관리 자격으로 기득권층인 양반을 견제하면서 밑바닥 민심을 달래는 소통 창구로 탈춤 마당 놀이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여러차례 발표한 바 있다. 요즘 말로하면 사회적 기반이 불안정한 비주류 지식인들이 인터넷 공간을 장악하면서 정치권이나 고위 관료를 비롯해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2세 등 특권층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네티즌으로 활동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 김해오광대의 주인공 격인 말뚝이.

김해오광대는 모두 여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마당에는 늙은 승려와 젊은 상좌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파계승들의 모습이 속세의 한량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둘째 마당에선 노름판이 펼쳐진다. 돈을 잃은 남자가 개평을 요구하다 남의 돈을 훔쳐 달아나다가 포졸에게 붙잡혀 간다는 줄거리다.
 
셋째 마당에는 양반 3명과 그들을 조롱하는 말뚝이가 등장한다. 부패한 양반들이 거드름을 피우다 서민의 대표격인 말뚝이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넷째 마당에선 흉측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괴물, 영노가 양반을 조롱하다 급기야는 잡아먹어 버리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다섯째 마당에선 젊은 애첩을 맞이한 영감이 아내 할미를 구박한다. 그런 영감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여섯째 마당에선 점잖게 앉아있던 사자가 담비를 약 올리다가 도리어 잡혀서 먹히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지역 민초들의 애환을 오롯이 담고 있는 김해오광대도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을 기점으로 맥이 끊졌다.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전통문화 행사를 금지한 것이다.
 

▲ 김해오광대 복원에 앞장섰던 고 류필현 원장.

그렇게 사라졌던 김해오광대를 재현하는 작업은 1984년, 당시 김해문화원장으로 일하던 류필현(2000년 작고) 씨에 의해 시작됐다. "가락면에 오광대 탈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것이 출발점이었다. 현지 주민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춤사위를 연구하고 대사와 노랫말을 녹음하는 등 복원 작업에 헌신하던 류 전 원장의 노력은 1986년, 당시 김해군 한림면에서 재현 공연을 하는 것으로 첫 번째 결실을 보았다. 
 
그다음 과제는 김해오광대가 무형문화재로 공인받는 작업. 문화재법적으로 김해오광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으려면 옛날 공연자들이 사용했던 탈과 대사를 기록한 대본, 그리고 춤사위 등 3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이후 과거 김해오광대가 사용했던 탈과 대본을 찾아 전국을 떠돌던 류 전 원장은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원형 그대로 보관된 김해오광대 탈을 찾아냈다.
 

마지막 남은 과제는 대본 찾기. 전국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면서 검색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던 류 전 원장의 노력은 1995년에야 결실을 보았다. 1964년에 발간된 경남도지에 최상수 당시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쓴 '야류오광대 가면극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에 김해오광대 대사 전문이 실린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완결될 것 같았던 무형문화재 지정 사업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과거 경남 김해군에 소속되었던 가락면이 1989년 1월 1일, 행정 구역이 재편되면서 부산시 강서구에 편입된 것을 근거로 ‘뿌리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부산에서 전승된 문화유산을 경상남도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논리였다.
 

▲ 정용근 김해오광대보존회 부회장.

지루하게 이어지던 논쟁은 2015년 3월 5일, 이훈상 동아대 교수팀이 "김해오광대는 옛 가락면을 포함한 김해지역 전역에서 꽃을 피운 문화재였다"고 발표한 고증 결과에 힘입어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37호로 지정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현재 김해오광대는 예능 보유자인 이명식(67) 현 김해오광대보존회장과 정용근(61) 부회장을 중심으로 보존회원 40여 명이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김해문화원에 모여서 2시간씩 연습하는 것으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둘째 주 토요일 7시, 국립김해박물관 마당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뽐내는 정기공연을 한다. 최근에는 고교생들이 수능시험 부담에서 벗어나는 매년 11월 말부터 김해 지역 초·중·고교를 '찾아가는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1일 분성여고, 4일 내동중, 5일 구봉초등, 27일엔 진영여중에서 공연하는 등 향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역들을 중심으로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김해뉴스 /정순형 선임기자 jun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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