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두항에서 바라본 제주 먼바다.

 

작가들 영혼 심은 유리의 성
최고 예술은 신이 내린 함박눈

카멜리아 힐 붉게 달군 동백꽃
셀카봉 촬영, 신세대 커플에 인기

밝은 햇살 얼굴 내민 도두항
멀리 푸른 바다가 희망 노래




문득 그리워지는 곳이 있다. 마음 깊숙이 자리한 고향도 아닌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 막연한 그리움에 찾아간 제주도의 아침은 함박눈과 함께 시작됐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뜨는 풍경을 자랑거리로 삼는 바다 마을. 아열대 지방에서 자란다는 야자수가 하얀 눈밭에 늘어선 풍경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러시아 혁명 시절 우랄산맥 아랫마을 유리아틴에서 '시'를 쓰던 '닥터 지바고'가 주인공이 눈썰매를 타고 연인 '라라'를 찾아가던 자작나무 숲길도 이처럼 아름다웠을까.
 
마냥 달콤한 기분에 빠져 있기에는 바쁜 여정, 들판 길을 따라 찾아간 곳은 '유리의 성'.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핑크빛이 감도는 와인 글라스에 코발트 빛 꽃병, 은빛 유리 구두 등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1층에 마련된 블로잉 체험관. 지도 강사의 손놀림에 따라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체험학습관이다. 그렇게 탄생한 유리 작품을 택배로 부쳐주는 서비스도 진행한다고 했다.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면서 예술적 체험을 누렸던 '유리의 성'.


야외 전시장으로 나가면 산책 코스가 있다. 백마를 탄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가 탔다는 호박 마차와 보석 터널, 호수를 건너는 유리 다리…. 자기 분야에선 최고라는 예술가들이 영혼을 심었다는 작품들이지만 하늘이 내려주는 함박눈에 비하랴. "가장 훌륭한 예술품은 신이 빚어낸 자연"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현장이다. 
 
두 번째 코스로 찾아간 카멜리아 힐. '동백꽃'을 주제로 만든 테마파크다.
 
"백설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수록 사무치는 정화/ 그 누구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 구절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장면의 연속이다. 시인이 노래하듯 눈보라가 몰아치는 들판에서 온몸을 불태우는 동백꽃.
 

▲ 눈 덮인 카멜리아 힐을 걸어가는 신세대 커플.

"그대를 사랑한다"는 '꽃말' 때문일까. 아니면 강렬한 이미지를 풍기는 분위기 탓일까. 그 역시 아니라면 '가슴이 붉게 멍들었다'는 식의 선정적 표현이 문제가 된 것일까. 1960~70년대에 동백꽃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방송금지곡'으로 묶였던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음반 판매량이 베스트 셀러를 기록할 만큼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들이 말이다.
 
잠시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 걷다 보면 눈 속에 얼굴을 내민 동백꽃 앞에서 셀카봉으로 기념 촬영하는 신세대 커플들이 줄을 잇는다. 어렵던 시절 우리 사회가 동백꽃을 둘러싸고 겪었던 사연들엔 관심조차 없는 분위기다. 
 

매서운 찬바람에 얼어붙은 몸을 녹일 겸 찾아간 코끼리 쇼 실내 공연장. 웬만한 집채보다 덩치가 큰 코끼리들이 색동조끼를 입은 조련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이채롭다. 열대 지방에 산다는 코끼리가 흰 눈이 내리는 제주도의 체육관에서 펼치는 이벤트. 자세히 살펴보니 피부색이 다른 조련사들도 라오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코끼리를 몰고 온 사람들이 제주도를 찾은 여행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이 글로벌시대를 실감케 한다.
 

▲ 실내공연장에서 코끼리에게 과자를 주는 어린이들.

마지막 코스로 예약됐던 추사 김정희 기념관. 눈 덮인 제주도 풍경을 그린 '세한도'가 탄생한 현장을 둘러본다는 생각이 가슴이 설렜지만, 폭설에 길이 막혀 찾아갈 수가 없었다. 조선 후기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로 유배 온 김정희가 '눈 속에 초라한 집 한 채와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장면'을 그렸다는 세한도.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는 추사의 뜻을 되새기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본 도두항. 제주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라고 했다. 어느새 눈발이 그치고 구름 사이로 밝은 햇살이 얼굴을 내미는 바다 마을. 회색빛이 감돌던 바닷물이 순식간에 푸른빛으로 변한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면/ 흰 돛을 단 배가 곱게 밀려온다"던 시인의 노랫말처럼 주변이 갑자기 밝아지는 느낌이다. 먼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우중충하던 눈바람을 흡수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담은 둘레길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쪽빛 바다는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말도 그렇게 생겨났나 보다.
 
김해뉴스 /제주도=정순형 선임기자 jun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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