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은 삶을 산 영원한 신여성
남녀 불평등 강요되던 1920년대
1년 9개월간의 꿈같은 여행기록



그녀에게 수식어는 너무 많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근대 신여성의 효시,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영원한 신여성. 바로 나혜석(1896~1948)을 일컫는다.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그녀.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예술가였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삶은 예술 자체였다. 한마디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그녀는 남녀의 불평등이 강요되는 사회,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에 항의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라며 사회를 바꾸려 했던 나혜석. 그녀는 첫사랑을 병마로 떠나보낸 뒤, '자기의 예술을 살리고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하지만 사람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여전히 신기루일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꿈도 꾸어보기 어려운 세계 일주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남편의 포상 휴가 덕이었다. 젖먹이를 포함한 세 아이가 있었고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70 노모가 계셨지만 그는 '자신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자신의 일가족을 위하여' 떠나기로 한다.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는 바로 그 여정기이다. 1927년 6월 19일 열차를 타고 부산진을 출발해 1929년 3월 12일 배로 부산항에 돌아오기까지 1년 9개월 동안의 나혜석의 세계 일주기이다. 당시 그녀는 남편 김우영과 부산 동래에 살고 있었다.
 
나혜석은 자식까지 두고 세계 일주를 한 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녀는 어떻게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까, 여자의 지위는 과연 어떤 것인가, 나의 그림은 어떤가" 하는 철학적·예술가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여정은 한 달여간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파리에 1년 2개월 머물면서 유럽 각지를 여행한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 각지도 돌아본다. 마지막으로 하와이를 거쳐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으로 1년 9개월에 이르는 여정이 마무리된다. 실로 놀랍다. 1927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세계를 주유한 것도 놀랍지만, 그 궤적이 완벽히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여행 중 나혜석은 요즘 여행객들도 섭렵하기 어려운 거장들의 작품을 부지런히 둘러보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끝없이 채찍질하고 되묻는다. 사실상 미술 기행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 각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도 놓치지 않는다.
 
여행기인 만큼 이국 풍경과 문물이 주는 감동과 깨달음도 담겨 있다. 독일에서 베토벤과 바그너의 곡 연주회를 듣고 "수백 명의 단원이 나와 관현악을 합주하니 관객의 마음은 서늘해지고 몸은 중천으로 떠오르는 느낌"이라고 전한다.  책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들이다. 그녀는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라고 했다. 또 자유로운 중국 하얼빈 여성들을 바라보며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여성이 불쌍하다"고 개탄한다.
 
나혜석의 세계여행은 사상적 해방구였던 동시에 나락의 길로 떨어지는 빌미가 되었다.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연애 사건으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혼자의 몸이 되어야 했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남성 이기주의를 고발하는 한편 작가로서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회의 냉대는 그에게서 자립의 기회는 물론 건강마저 앗아가고 만다. 시대와 화합할 수 없었던 불꽃 같은 예술가의 삶은 1948년 무연고 행려병자로서 막을 내린다.   나혜석의 여행기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근대적 개인으로 변화·변모해 가는 신여성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했던 시절에 그렇게 오랫동안 세계를 주유한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90년 전의 기록이지만 최근의 여행기라 해도 될 만큼 모던하고 생생하다.
 
부산일보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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