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선임기자

미투 운동이 평창동계올림픽 열기를 뚫고 연일 이슈가 되었다. 젊은이들의 꿈과 이를 이루려는 간절함을 성적 착취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분이 컸다. 제자 또는 후배로 호명되어야 할 이들이 '더러운 욕망'의 배출을 위한 성적 대상으로 호명되어 왔다. 그런 행태들이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쌓았던 명망은 한 순간에 추락하고, 공동체 왕국은 몰락했으며, 내부 구성원들 간에는 배신과 한탄과 발뺌의 장면들이 이어졌다.

이윤택은 그 와중에 '18년 관행'이나 '성폭행은 없었다'라는 법정 대비 변명을 했다가 오히려 화를 키웠다. 왜 18년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말했을까? 그걸 굳이 따지는 것은 그 18년이라는 기간이 자칫 여성성에 대한 차별과 착취의 시간을 뭉뚱거리거나 일반화시키는 착시효과를 가져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었던 기간을 그렇게 파편화시킬 수는 없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국내에서도 예술계와 학계 그리고 종교계까지 휩쓸며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그만큼 이 사회의 여성성 문제가 심각했다는 반증이다. '지금'에서야 '그때'의 일들이 화산처럼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지금인가? 지금과 그때는 무엇이 다른가?

SNS와 인터넷에 폭로되는 성추문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공통된 게 하나 있다. 폭행이나 추행을 당한 뒤 선배나 주변 관계자에게 도움과 조치를 요청하지만 번번히 묵살되거나 오히려 회유되는 상황이 그것이다.

조직 내부자들이 피해자보다는 힘이 있는 가해자의 편에 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생각난다. 나찌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던 그는 악한 권력에 복무하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수행한 행태를 목격하고 이같이 명명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곧 '사유하지 않는 행위'이다. 개개인이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한 악은 언제라도 우리 주변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권력 시스템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그 권력이 유지되어야 자신도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또 권력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는 생존법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에서 그 전형을 보고 있다. 밀실에서 수많은 불법과 비리가 이루어져 왔지만 청와대나 정부의 핵심들은 이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법행위들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권력을 이용해 사적 이해를 관철하고 주변은 이를 도와주는 힘의 커넥션은 그때의 질서였다. 지금, 그러니까 지난 촛불집회 이후 그 질서는 급격하게 와해되고 있는 중이다. 사회가 정상화, 상식화 되는 과정이다. 미투 운동 또한 그 흐름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때는 또한 약자의 대변자가 되어야 할 미디어가 권력이나 기득권층에 의해 통제되는 시기였다. 지금은 언론과 미디어의 질서 또한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개개인 누구나가 사회를 향해 발언하고 호소하는 환경이 되고 있다.

이렇게 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재편되고 있음을 본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권력을 중심으로 수직계열화 되어 일방통행만 가능하던 시기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이 글의 제목은 홍상수의 동명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따왔다. 지금에 꼭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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