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훈 마르떼 대표

작년 연말 흥미로운 연주회가 있었다. 3개의 연주단체가 '클래식전쟁 배틀콘서트'라는 주제아래에 한곡씩 총 4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되어 공연이 끝난 자리에서 관객의 온라인평가만으로 공연수익의 절반을 상금으로 들고 가는 이색연주회였다. 
 
이 연주회의 팸플릿에는 연주단체의 그 어떤 정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전에 연주자들의 정보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평가의 척도는 오직 관객의 귀와 눈이었다. 평가결과는 놀라웠다. 학력, 흔히 말하는 연주자 프로필이 제일 낮다고 평가 될 단체가 우승을 하였다. 
 
2013년 한국과 미국은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과 미국시민들을 대상으로 외교통상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이 공동으로 주관하여 "60년 번영의 동반자(60 Years of Partnership and Shared Prosperity)"라는 주제로 공식 로고를 공모하였는데, 당시 이 로고는 양국의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자리에 로고가 노출 될 만큼 큰 영향력을 지닌 상징성이 있는 디자인이었다. 우승자는 놀랍게도 외국에서 공부를 한 디자이너도 아니었고 대한민국의 최고라 불리는 홍익대학교 출신의 디자이너도 아니었다. 2년제 전문대를 나온 디자이너였다.
 
연주회를 가든, 전시회를 가든, 우리는 팸플릿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눈길은 곧바로 이 연주자가, 작가가 무엇을 전공했고 어디에서 공부를 했으며 외국에 유학은 다녀왔는지부터 자연스레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그들의 예술행위와 작품에 다른 시선을 지닌 채 예술과 마주한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들으려고 하는지, 무엇을 통해 보려고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모든 예술행위가 프로필로 증명되어지기를 바라는 관객으로서의 욕구가 반영되어지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화려한 프로필에 녹아 있는 학력들이 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데 있어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그 노력과 결실들이 다 설명될 수 없기에 프로필이라 불리는 텍스트로 하여금 설명되어지기를 바라고 그 과정에 따른 수고들을 보상받기를 원하는 일종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성공리에 마무리 된 평창동계올림픽의 개·폐회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전통과 기술, 문화가 절묘하게 융합되어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은 행사의 음악감독은 의대를 졸업하고 음악과 관련된 그 어떤 학력도 지니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양방언'이었다. 뿐만 아니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에 걸려있는 '기억의 지속'을 그린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또한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를 중퇴한 오늘날로 치면 대학졸업도 하지 않은 비전공자이다. 얼마 전에 작고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디자이너 '자하 하디드'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건축가이다. 그녀 또한 수학을 전공한 비전공 디자이너이다.
 
우리는 예술과 학력을 어떻게 연관시켜서 바라봐야 할까? 학력이 좋으면 음악이 좋고 작품이 좋다는 편견이 어쩌면 더 나은 예술작품으로의 방향성에 한번쯤은 재고를 시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오직 연주로 평가받고, 작품으로 가치가 매겨질 수 있는 기준이 객석과 관람객으로 하여금 계속된 시도가 되어지고, 예술계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많은 예술콘텐츠들이 한손으로 소비되어지는 현시대에 제일 두려운 대상은 함께하는 예술인들이 아니라 오직 눈과 귀만으로 가치를 결정하는 관객과 관람객들이 되어야 하며, 그들 또한 프로필에 적혀있는 텍스트로 눈과 귀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 '프로필 없는 음악회', '프로필 없는 전시회'가 정답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좋은 예술의 생산과 소비의 건강한 관계가 선순환 되어 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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