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신작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을 발표한 소설가 김훈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그 소설을 나 역시 눈이 아프게 들여다보았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죄와 알선수재죄로 징역형을 받은 전직 군청공무원 아버지와, 민통선 안 국립 수목원의 전속 세밀화가인 스물 아홉 살 난 딸, 남편을 '그 인간'으로 부르는 어머니, 수목원 안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민통선 안의 꽃과 나무와 곤충까지 이 소설 속에서 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는 문학 따위보다 삶이 훨씬 중요하며,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과도하다고 할만큼 수많은 상처를 동반하는 것이 삶이라고 여러 지면에서 여러 번 말해 왔다. 이 소설 속 화자인 스물 아홉 살 딸 조연주가 감당하기에 삶은 벅차다. 식물을 세세하게 그리는 세밀화가인 조연주는 자신이 그려야 하는 꽃과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
 
대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을 통해 식물의 세계에 눈뜨게 된 그녀는 식물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는, 단순하면서도 이질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김훈의 문장으로 읽어보면 그 차이를 더 잘 알 수 있다. '나무는 숲속에 살고, 드문드문 서 있는 그 삶의 외양으로서 숲을 이루지만, 나무는 숲의 익명성에 파묻히지 않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고, 다만 단독했다.'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 고독과 고통과 연민과, 나무의 그것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작가 특유의 말들과 문장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에서도 느꼈지만 그의 문장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특유의 문체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고 그 문체가 작품의 향기를 전해주는 최고의 도구이지만, 김훈 작가의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은 그의 문장에 깊은 인상을 받곤 한다. 처음 읽을 때는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느낌을 받지만, 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으면서 다시 읽어보면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게다가 작가의 글을 통해서 비로소 어렴풋하게 맴돌던 것이 뚜렷하게 형상화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느낌마저 든다.
 
'군인들의 밥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그 밥은 음식으로서의 표정이 없었고, 재료의 맛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라든가, '나물을 말리면, 그 맛과 향기의 풋기가 빠진다. 말린 나물은 맛과 향기의 뼈대만을 추려서 가지런해지고 맛의 뼈를 오래 갈무리해서 깊어진다. 데치거나 김을 올리면 말린 나물은 감추었던 맛과 냄새와 질감의 뼈대를 드러내는데, 그 맛은 오래 산 노인과 친화력이 있을 듯싶었다'같은 글을 읽고 있으면 대상물의 특징이 정확하게 다가온다.
 
이런 문장을 쓰고 있는 김훈 작가가 세밀화가인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이끌어가는 소설은 격정적인 분노나 슬픔 없이 진행된다. 그래서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처럼,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 저무는 것처럼,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소설도 끝난다. 홀로 우두커니 먼 산 바라보며 사는 게 무엇인가 묻고 대답해 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 속에서 삶의 순간마다 배어든 깊은 고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표현하기에 적격인 김훈 작가의 문장도 감상해 보기 바란다. 그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필요 없는 낱말과 조사를 핀셋으로 세심하게 뽑아낸 다음 대패로 한 번 더 밀어버린, 잘 다듬어진 목재 같은 걸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박현주 객원기자
북칼럼니스트, 동의대 문헌정보학과 강사·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