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전 언뜻 보기에도 연세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 한 분께서 아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로 찾아 오셨다. '2~3일 전부터 어머님이 발음이 어둔하고 걸을 때 한 쪽으로 자꾸 넘어지신다' 라는 이유였다. 연세를 여쭈어 보니 올해 90세, 소위 졸수(卒壽)의 고령이시다.
 
진찰 상으로 뇌졸중(중풍)이 의심되어 '급성기 뇌졸중 같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셔서 뇌 검사부터 받으시고 입원치료를 해야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니 아들과 할머니 두 분 모두 '원장님께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급성기 뇌졸중은 발병 후 7일에서 10일 정도가 중요하면서도 고비가 될 수 있어 24시간 진료체계가 갖추어진 3차 의료기관(소위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안전하다는 설명을 재차 드렸으나 굳이 여기서 치료 받게 해 달라고 말씀하신다.
 
이유인즉 20년 전 필자가 마산에서 중풍 전문병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할머니께서 당시에도 중풍이 발생하여 필자에게 치료를 받았으며, 다행히 후유장애 거의 없이 회복해 지금까지 잘 지내셨다는 말씀이다. 할머니께서 '지금은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팔다리 마비되어 자식들에게 폐 끼치다 갈까 봐 그게 걱정이 된다. 원장님이 치료해 주면 예전처럼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뭐 치료하다 잘 안되어도 원장님 원망은 하지 않을 테니 꼭 좀 치료해 주소'라고 말씀하신다. 함께 온 아들도 어머님 부탁을 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다소 난감하긴 했으나 일단 뇌 검사 결과를 보고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뇌 MRI 검사를 시행 하였다. 역시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이 이전과는 반대편 뇌 쪽에 발생해 있었다. 그나마 크기가 크지 않아 일단 입원한 뒤 치료를 해 보자고 말씀드리고 치료를 시작하였다. 다행히 증상이 더 악화되지 않고 조금씩 회복되어 수 일간 입원치료 후 걸어서 다시 댁으로 퇴원하셨다.
 
90세의 연세에 비록 허리는 굽으셨으나 두 차례의 중풍을 겪으시고도 다시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가시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조금의 뿌듯함과 함께 졸수(卒壽)가 아닌 백수(白壽)에 다시 뵐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건강 백세인(百歲人)도 드물지 않기에 기대를 해 본다. 비록 구부정한 허리에 졸수의 연세이시지만 당신의 건강보다도 나이 들어 힘든 병으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던 할머니를 배웅하면서 문득 어느 시인의 '들꽃이여'라는 시가 생각나는 오후이다. 
 
바위 틈새 비집고 피어난/한 떨기 청초한 들꽃이여!/아픔마저 가슴 속 깊이 묻고/흐느끼듯 서 있는 몰골마저 휘어진 들꽃이여!/모진 바람 홀로안고 이겨내느라 가녀린 허리 굽어진 들꽃이여!/양볼 비벼주던 따뜻한 젖가슴/이제 빈껍데기 되어버린 나의 들꽃이여!/무지개 빛 사랑 접고 또 접어/행복의 큰 울타리 되어주던 나의 들꽃이여!/존재하였다는 의미만으로도 아름답고 고귀한 나의 들꽃이여!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홍태용 원장의 '병원 창을 통해 본 세상'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김해뉴스 /홍태용 한솔재활요양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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