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수유와 매화 향기 가득한 반교리 돌담길.

 

평범한 사람 모여사는 반교리 돌담마을
추사 김정희 글씨 걸려있는 휴휴당

조용한 백제 마을엔 신동엽 문학관
기와 조각에서 이름 찾은 정림사탑


 

낮은 돌담이 정겨운 마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280호로 등재된 충남 부여군 '반교리 돌담마을'의 첫인상은 소박했다. 마을 입구에는 유스호스텔이 있다. 외지 사람들이 단체로 묵어가는 시설이 있지만, 한적한 마을 분위기를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돌담길이 펼쳐진다. 담장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촌집 마당에는 승용차와 경운기가 나란히 서 있다. 헛간에 쌓여 있는 땔감용 통장작이 묘한 향수를 자아낸다.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듯 감상에 잠기려는 순간, 한 무리의 도시사람들이 골목길을 가득 메운다.
 
"부여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러 왔다가, 잠시 짬을 내어 구경 왔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흘러간 역사를 논하기 위해 찾아온 부여에서, 문화 유적과는 관련이 없는 돌담마을을 구경 온 사람들.
 
수년 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이 마을에 '휴휴당'이라는 촌집을 지은 뒤부터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 주민들의 귀띔이다.
 
내친김에 찾아간 휴휴당. 입구 양측에 선 돌기둥에 장대가 걸려 있다. 유 전 청장이 '출타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다.
 

▲ 봄볕이 인사하는 휴휴당.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장대 옆으로 살며시 들어간 휴휴당. 마당 앞쪽에 마련된 정자에는 '탁오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는 곳. 퇴계 이황이 단양 군수로 일할 때, 바위에 새겨두었던 글씨를 옮겨 놓은 현판이라고 했다. 도시 생활에 찌든 자신을 재충전한다는 뜻에서 걸어둔 현판이 아닐까.
 
본채 왼쪽 벽면에는 독특한 서체를 선보인 한자가 걸려 있다. 짧은 한문 실력에, 익숙지 않은 서체라 읽기조차 힘든 여덟 글자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즈음, 승용차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온다. 자동차 문을 열고 내리는 60대 남자, 집주인인 유 전 청장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가오는 매너에 친근감이 싹튼다.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간 원죄(?)를 잊은 듯, 본채에 왼쪽에 적혀 있는 여덟 한자의 뜻을 묻는 말에 유 전 청장은 쉽고 간결한 답변을 돌려준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나를 오래 앉아있게 하는 집."
 
특특한 서체로 쓴 그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라는 보충 설명에 덩달아 문화적 소양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느낌이다. 자기 집 앞마당에 심어둔 매화와 산수유를 정성스럽게 둘러보면서 "공기가 너무 맑아서 담배를 피우기조차 미안하다"는 유 전 청장.   
 
"기왕에 역사의 고장, 부여에 오셨으니 읍내 유적지를 둘러보고 가시라"고 권한다. 반교리 돌담마을에서 자동차로 30분가량 달려서 찾아간 부여읍.
 

▲ 신동엽 시가 적혀 있는 게스트하우스.

 
"대낮처럼 조용한 꽃다운 마을/ 다시 가시줄 늘이고(중략)/ 머리채로 사무치고 노래 불러/ 강산을 채울 것이며…."
 
조용한 백제 마을을 찾아온 사람에게 쉬어갈 공간을 제공한다는 게스트하우스 담벽에 적힌 '시'로서는 다소 무겁게 느껴진다. 알고 보니 신동엽 시인이 태어난 생가터 옆에 자리 잡은 게스트 하우스라고 했다. 호기심에 둘러 본 신동엽문학관. "껍데기는 가라"며 4·19세대를 질타하던 시인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 정림사터 지켜온 5층 석탑.

신동엽 문학관에서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에는 '정림사터 5층 석탑'이 있다. '백제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는 탑(平濟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탑 아랫부분에 새겨 놓은 글 때문에, 무려 1382년 동안 ‘치욕의 상징’으로 알려졌던 석탑이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진행된 발굴 작업에서 ‘태평팔년술진정림사(太平八年戌辰定林寺)’라고 쓰인 기와 조각이 나오면서 제 이름을 되찾은 탑이라고 했다. 천오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한결같이 부여를 지켜온 5층 석탑. 화려했던 백제의 도읍에서 한적한 시골 소읍으로 변해가는 부여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라는 생각에 처연함 마저 밀려온다. 
 
마지막 코스로 들른 백마강변 나성.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부여에서 태어나 백제를 그리워하고 금강을 사랑했던 시인, 신동엽의 시비가 정답게 다가왔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는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 날지어이"

부여=김해뉴스 /정순형 선임기자 junsh@


▶반교 돌담마을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동로 6.
가는 방법 = 남해고속도로(42㎞)를 타고 가다 통영대전고속도로(86.9㎞)로 갈아탄 뒤 익산포항고속도로(61.3㎞)를 이용하면 된다. 약 3시간 40분 소요.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