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순형 선임기자

"환율은 주권입니다.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나라는 없습니다."

수년 전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했던 말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 경제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정부가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 투기 자본들의 공세로부터 우리 기업들을 보호하려면, 정부 차원에서 방어 기제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일부 학계에서는 "시장원리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재계에선 환호성을 올렸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나라 중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국가는 한국뿐이다.", "대외의존형 경제로 고도성장을 이뤄낸 한국의 정부가 아직도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제는 한국 정부가 환율 시장에 개입해서 무역 흑자를 누리는 행태를 멈출 때가 되었다."

대체로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제기된 항변이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은 "한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는 등 거의 직격탄 수준의 공세를 가해왔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주장에도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총성 없는 전투가 시시각각으로 벌어지는 글로벌경제 시대에 무역 거래는 자선 사업이 아니다. 한 번 경쟁력을 잃어버리면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이 국제 경제의 생리다.

지난 2011년 세계휴대폰 시장에서 13년째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고 자랑하던 핀란드의 노키아사가 불과 2년 뒤인 2013년 9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인수 합병됐을 만큼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것이 글로벌 시장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지난 1997년,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을 자랑하던 우리나라가 외환관리에 실패한 나머지 IMF에 경제 주권을 넘겨주면서, 알짜기업들을 헐값에 내다팔고 주요 금융기관들을 외국 자본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굴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 상처를 딛고 일어선 한국경제이기에 지난 20년간 국제 경제 회의에 참석한 우리 경제 관료들이 거의 육탄 방어에 가까운 전투 모드로 환율 주권을 지켜온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환율 주권론도 한계에 부딪힌 것일까.

지난 22일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한국 정부는 외환시장 개입 정보를 점진적으로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이 국제 외환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더 이상 환율 주권론을 고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가 환율시장에 개입한 정보를 공개한 만큼 투명성이 높아져서,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처럼 국제무대에서 한국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 해서 '우리기업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국제 투기세력의 먹잇감이 될 우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 기업들이 (과거 핀란드의 노키아처럼) 위험에 처했을 때 우산 역할을 해야 할 정부가, 손발을 묶인 채로 지켜만 보아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는데도 세심한 전략이 필요하다. 환율은 주권이기 때문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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